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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연수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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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un 11. 2022

공채

공채형 인간

나는 공채로 회사에 입사했다.


내가 취업을 준비할 때만 해도 많은 대기업들은 그룹사 단위의 대규모 채용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공채를 유지하는 기업 자체가 많이 줄었다. 적시에, 직무에 최적화된 인재를 찾는다는 목적으로 많은 회사들이 수시채용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수시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탓에 ‘동기’라는 의미는 많이 퇴색되고 기수 문화도 거의 사라졌다. 신입사원 연수를 수백 명 단위의 여러 차수를 운영할 정도로 많은 인원을 뽑을 때 나는 물 흐르듯이 운 좋게 회사에 들어왔다.


경영지원 직렬로 7개 정도의 지원서를 접수했다. 유치하고 단편적인 생각이지만 말 그대로 경영을 지원하는 직무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회사가 잘 굴러가기 위해 묵묵히 스태프로 역할을 하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직원들의 역량을 개발해 나갈 수 있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교육 직무에 전공무관으로 지원할 수 있는 기업들만 쏙쏙 골라 지원서를 제출했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기에 교육 분야에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지금의 회사는 나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실제로 면접 당시에 교육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한 경쟁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최종 합격자가 한 자리였던 소수 직렬을 뚫고 입사하게 된다.


나는 어디에나 쓰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특기가 없었다. 내 전공은 공학이었기에 요즘 언어로 인문계열보다는 아주 조금 더 전문성이 있다고 보일 수 있지만 그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이다. 학문의 경계를 한 발짝만 벗어나는 순간 나는 바보가 되었다. 재경이든 마케팅이든 어떤 일을 맡아도 그저 걸음마 단계부터 시작해야 하는 수준인 것이다.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직무역량, 조직적합성과 인재상을 기반으로 채용하는 공채의 장점을 온전히 누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교육이라는 직무를 하기를 원했지만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내가 교육을 잘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학창 시절 애정을 갖고 했던 다양한 활동들이 전부였다. 당연히 교육 관련 전공지식이나 전문적인 훈련을 이수한 이력은 전무했다. 그런 나를 뽑아준 건 어쩌면 나의 성향이나 기질, 어린 날의 치기 어린 자신감 때문이었나 싶기도 하다. 


공채 출신의 나는 지금, 제법 잘 살아내고 있다. 대단히 만족감이 높거나 성취감이 크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힘든 순간은 많고, 업무를 하다 보면 벽에 부딪힐 때도 많다. 그렇지만 가끔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도 한다. 


공채에 단점이 있다면 각각의 인재들이 원하는 직무에 배치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영업·마케팅’이나 ‘경영지원’, ‘해외영업’처럼 큰 단위의 직무로 입사를 하고 배치를 받으면 실제 부서에서는 짐작도 못했던 일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가령 경영지원만 해도 인사, 총무, 재무, 교육 등의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자신이 어떤 일을 수행하게 될지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막상 현업에 투입되었을 때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실제 교육을 할 수 있었던 나는 매우 운이 좋은 사례였다.



입사를 하고 나면 많은 신입사원들이 ‘내가 상상했던 일이 아닌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지거나 현실에 실망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날이 갈수록 일이 재미있었다. 밥 먹듯이 야근을 해도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인지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낼 수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모든 걸 운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은 때론 무기력한 감정을 야기할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실제로 운이 좋았다고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가끔 인정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필요하다. 물론 공학이라는 전공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개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지만 나의 경쟁자들이라고 해서 노력을 안 했겠는가.

무엇보다 공채라는 제도 안에서는 원하는 직무에 배치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영업·마케팅’이나 ‘경영지원’, ‘해외영업’처럼 큰 단위의 직무로 입사를 하고 배치를 받으면 실제 부서에서는 짐작도 못했던 일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가령 경영지원만 해도 인사, 총무, 재무, 교육 등의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자신이 어떤 일을 수행하게 될지는 쉽게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막상 현업에 투입되었을 때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실제 교육을 할 수 있었던 나는 행운이 가득했다.



‘운’ 외에 원하는 직무를 쟁취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찾는다면 그건 ‘고민’ 덕분이다.

대학생활 내내 나는 진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걱정과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전공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다만, 전공이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기력하게 주저앉지는 않았다는 점이 긍정적인 포인트였다. 전공 공부에서 힘을 조금 빼는 대신 그 시간을 다른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 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를 수많은 작은 시도들을 통해 찾아보려 애썼고, 대부분의 경험들은 소거법을 통해 삭제됐다. 그리고 남는 몇 가지의 일들 중 내가 진정으로 희열을 느꼈던 순간들을 조합해 원하는 분야를 찍었다. 그런 나에게 기회를 준 회사와 지금껏 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나와 같은 공채형 인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한 분야에 특화된 역량은 부족했지만 기업의 고유한 문화나 인재상에 부합하는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채는 엄밀히 말하면 구직자들의 입장보다는 조직운영 관점에서 득이 많은 제도였다. 일단 채용 프로세스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핵심가치나 조직적합성을 기반으로 최대한 인재들을 많이 확보해 놓으면 회사에서 다양한 분야에 넓게 활용하기가 좋다. 무엇보다 범용적으로 활용 가능한 인재들을 큼직한 단위 직무에만 맞게 선발하면 필요한 인력소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인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당장 채용을 해야 하는 직무 포지션을 명시하여 인재를 채용한다. 원하는 타깃이 명확하고 구체화된 것이다. 마케팅이라는 포괄적인 표현 대신 ‘신규 스페이스 브랜딩’과 같은 구체적인 직무를 공개하고 세부내용에는 입사 이후 어떤 업무를 수행할지 상세히 안내하는 방식이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업무적인 부담이 늘었지만 나는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라고 믿는다. 기업은 직무에 최적화된 인재를 찾을 수 있고, 구직자 입장에서는 본인이 갖고 있는 니즈를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모범생보다는 소위 나쁜 남자 같은 인재에 더 매력을 느끼는 시대인 것 같다. 나 역시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조금은 밋밋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조금은 뾰족하더라도 한 분야에 애정이 많고 본인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인지하고 실현하는 게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고 공채형 인간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필요는 없다. 공채형 인간들은 항상 수요가 있다. 다만 상당한 고민의 과정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이 내가 오랫동안 해낼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그걸 판단할 수 있는 경험도 많아야 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예전보다 더 직업을 갖기 어려울 수는 있다.


* '공채형 인간'은 사과집 작가님의 책 [공채형 인간]을 감명 깊게 읽고 인용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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