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찾아왔다." 독립유공자 함석헌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갑작스럽게 해방을 맞이한 한국은 수많은 해외의 선진 지식들이 공습을 하다시피 한반도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또한 그동안 억눌려있었던 정치활동의 자유가 해제되자, 수많은 인사들이 정치적 의사 발언과 표현, 행동을 하기 시작했죠. 더불어 해외에서 강렬히 저항하거나 일제를 피해 도망간 한국인들도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아수라장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 치안대 조직으로 안정이 되기 시작하였으나, 왕정에서 벗어나 민주정으로 나아가는 시기에 많은 사상과 이념적 혼란이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 시기에 흥미로운 여론조사가 있었습니다. 무려 미군정청이 1946년 7월에 조사한 자료입니다. '미래 한국 통치구조' 여론조사라는 이름으로 군정청여론국에서 주도하였습니다. 30개의 항목에 대해 여론조사를 진행했는데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問) 3)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軍政廳輿論局, 朝鮮國民이 어떠한 종류의 政府를 요망하는지 여론을 조사)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릅니다 653인(8%)
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약 2,5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38선을 기준으로 남측에는 1,600만 명이 살고 있고, 북측에는 900만 명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 이를 감안하더라도 당시 한국인의 77%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상대적으로 자본주의는 14%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도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물론 여론조사에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이 여론조사를 주도했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굳이 미군정청이 사회주의 옹호를 과장할 필요도 없었겠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군정청의 지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지지자를 더 늘려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 하고 있는 여론조사와 같은 경우에도 표본이 2,000명 정도 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위 여론조사의 표본은 가히 역대급으로 많습니다. 5100만 명에서 2,000명으로 여론조사를 하는 지금과 2,500만 명 인구에서 8,000명을 여론조사했다는 점은 비교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조사의 기술과 분석은 지금이 압도적으로 더 우월하겠지만, 표본이나 편향성 면에서는 의심할 거두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지지자가 많은 것일까요?
우선 역사적인 흐름으로 인하여 자본주의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일제는 이미 발전한 경제와 높은 수준의 자본으로 조선의 경제를 완전히 잠식하였습니다. 1910년대 경술국치로 나라를 완전히 빼앗은 이후,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조선 내의 토지를 모두 파악하고, 신고주의를 채택하여 미신고 토지는 모두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매입하여 일본인들에게 값싸게 팔아넘겼습니다. 지주가 조선인에서 일본인으로 바뀐 것이죠. 정태헌 교수님의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 구축 과정"이라는 논문을 보면, 1918년 말 10 정보 이상의 지주 가운데 일본인 지주는 7.1%(3,241명)에 불과하지만 천석꾼이라고 불리는 100 정보 이상의 대지주 가운데 61%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한국민족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 정보는 3,000평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00 정보면 300,000만 평으로 볼 수 있겠죠. 여의도 면적이 87만 7천 평이니까, 대지주 일본인 1명이 여의도 면적의 절반 크기의 영토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일본인 대지주가 한국에 많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회사 설립을 엄격하게 금지하였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일본의 거대 기업들이 조선 내부 경제로 파고 들어갔고, 자리 잡은 이후인 20년대에는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완화하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이미 일본 자본이 잠식하고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자본이 잠식당하고, 토지를 빼앗기긴 조선인들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토감정이 생겼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대체적으로 자본을 갖고 있는 한반도 내에 일본인에 대한 반발심과 비토 감정으로 그 이론에 반대되는 이론과 이념에 대해 선호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마침 그때 당시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하며 폭발적으로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론은 조선에도 도달하게 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선호하게 되었죠. 그 여파가 해방 당시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정확하게 알고 그 이념을 선호하는 것이 아닌 자본을 갖고 있었던 친일파와 조선 내의 일본인에 대한 저항인 셈입니다. 결국 미군정청은 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3년 간의 신탁통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도 한국을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반대로 소련은 즉각 독립을 원했습니다. 그야 소련이 착해서가 아니라 당장 해방시키고 선거를 치르더라도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한국 특성상 사회주의 성향의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고, 이는 친소련의 인물이 한국의 지도자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는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반도의 역사를 전부 흔들어 버립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 출처 -
(1) 국가기록원. (n.d.). 1940-1950년대 인구정책. 국가기록원 아카이브.
https://theme.archives.go.kr/next/populationPolicy/policy1950.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