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 그 원대한 꿈과 다르게 정조는 종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록에서는 정조대왕이 어떤 고통을 겪었으며, 어떤 최후를 맞이하였을까요?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徐龍輔)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용보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밤이 되면 잠을 전혀 깊이 자지 못하는데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가 지금 이미 고름이 떠졌다." 하였다. 의관 백성일(白成一)·정윤교(鄭允僑) 등을 불러들여 약을 붙였던 자리를 진찰하도록 명하고, 분부하기를, "어제에 비해 좀 어떤가?"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독기는 어제보다 한층 더 줄어들었습니다." (중략) "터진 곳이 작으니 다시 침으로 찢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이미 고름이 터졌으므로 다시 침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음력 1800년 6월 14일 종기로 인하여 진찰을 받은 대화 장면입니다. 이미 정조는 고통으로 인하여 밤에 잠을 설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약을 붙인 자리에도 고름이 생겼다고 하며, 등에도 비슷한 것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대화 이후에 정조는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다른 보직으로 교체시켰습니다.
약원(藥院)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도제조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의관의 말을 들으니 머리와 등쪽에 또 종기 비슷한 증세가 있다 하므로 애타는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머리 부분은 대단치 않으나 등쪽은 지금 고름이 잡히려 하고 게다가 열기가 올라와 후끈후끈하다."
다음날인 6월 15일은 조선왕조실록 기록 전체가 정조의 병과 관련된 기록만 있었습니다. 정조는 머리는 크게 아프지 않으나 등 쪽에는 종기가 나고, 열기가 올라와 후끈후끈하다고 말하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행인고를 지어 올리고, 백호탕을 두 첩 올렸다고 합니다. 백호탕은 속열을 내리는 처방약이라고 합니다. (1) 다음날인 6월 16일에도 정조대왕은 진찰을 받고, 약을 먹었습니다. 6월 17일에는 가감소요산과 금련차를 달여 올리라고 명했다는 기록 하나만 있습니다. 디지털인문학연구소에 따르면 가감소요산은 기혈이 허해짐으로 땀을 흘리면서 조열이 나는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이라고 합니다. 이 날부터 정조대왕이 식은땀과 기력 저하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월 18일에는 약원이 진찰받기를 정했으나 정조께서 윤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6월 19일에는 약원의 신하들이 병세가 좋지 않은 것을 걱정하여 직숙(교대 근무, 야간 불침번 비슷한 느낌)을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6월 20일에는 가감소요산은 그만 주고, 유분탁리산 1첩과 삼인전라고, 메밀밥을 지어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삼인전라고가 무엇인지는 조사가 안되지만, 유분탁리산이란 피부가 짓무르고 잘 낫지 않는 것으로 열이 심하게 나고, 종기(피부질환)가 붓고 아프며 가렵고, 곪아 터지면 염증이 생겼을 때 핏줄로부터 조직 또는 체강 속으로 스며 나온 액체가 계속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2)
약원의 제신과 대신(大臣)·각신(閣臣)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李時秀) 등이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높이 부어올라 당기고 아파 여전히 고통스럽고, 징후로 말하면 한열(寒熱)이 일정치 않은 것 말고도 정신이 흐려져 꿈을 꾸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도 있다."
6월 21일 기록에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너무 아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날에는 아픈 나머지 수라를 챙겨 먹지 못하고, 쌀미음만 조금 마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아뢰기를,"밤 사이에 종기 고름은 계속 순조롭게 흘러 나왔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름이 나오는 곳 이외에 왼쪽과 오른쪽이 당기고 뻣뻣하며 등골뼈 아래쪽에서부터 목뒤 머리가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그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硯滴)만큼이나 크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밤 사이에 열증세는 조금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밤공기가 매우 더워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중략) "어젯밤같은 무더위 속에 어찌 잠을 붙일 수가 있었는가마는 그젯밤에 비해서는 조금 나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어나 앉아 보고 싶어 경들을 불러 접견했지만 이 또한 힘이 든다."
6월 25일 기록에서는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잠을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요자리에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종기 자리가 어떠한지 궁금하므로 경들을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6월 26일에는 "어젯밤도 편히 눈을 붙이지 못했다." "수라는 완전하게 다 맛보지 못하고 원미(元味)만 조금 먹었다."라는 기록이, 6월 27일에 "어제저녁에 들어와 진찰할 때 상께서 마치 주무시는 듯 정신이 몽롱한 증세가 있었는데 지금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밤에 계속 그러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젯밤을 지샌 일은 누누이 다 말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종기 증상이 너무 심해 누워서 자고 있었을 뿐인데 피가 몇 되가 넘게 흘렀으며 잠을 못 잔 것을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상이 최악으로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 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하므로 환지 등이 물러가 문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뒤에 환지 등이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소리로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다고 아뢰었다. 자궁(慈宮)이 대내로 들어가자 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다. 부제조 조윤대(曺允大)가 성향정기산을 받들고 들어오자 시수가 받들어 올리면서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갈을 입안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또 인삼차와 청심원을 계속 올려드렸으나 상은 마시지 못했다.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 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이렇게 정조대왕은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고 만다.
1800년 1월부터 병세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6월 14일에 종기와 관한 첫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죠. 처음에는 종기를 침으로 제거하거나, 등이 후끈후끈하다고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식은땀과 기력 저하를 해결하기 위한 약을 먹기 시작하더니, 21일에는 꿈과 현실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23일 기록에는 종기가 여기저기 머리부터 등골뼈까지 났다고 하는데 크기가 연적만큼 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적이 대략 1cm에서 1.5cm 크기이니 무지하게 크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밤공기가 매우 더워 견딜 수 없다고 하였고, 25일에는 밤에 피가 너무 많이 흘러 몇 되는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 단위 되는 1.8L 정도로 추측하고 있죠. 70KG 체중의 성인 남성의 전체 혈액량이 5-6L인 점을 감안한다면, 전체 혈액의 30-40%를 흘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일 뒤에 정조대왕은 승하하게 되죠. 정조 승하 이후 1800년부터 1863년간 조선은 역대 최악의 세도정치 기를 겪게 됩니다. 순조, 헌종, 철종이라는 3명의 군주 동안 외척 가문이 조선 정부를 통채로 잡고 부패를 일삼았죠. 매관매직과 삼정의 문란은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조선의 끔찍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정조대왕이 종기를 이겨내고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여 화성에서 노후를 보냈다면, 조선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의 IF는 없지만 또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기록인 것 같습니다.
- 출처 -
(1) 속열 내리는 대표 처방약 ‘백호탕’. (2016, 10월 10일). KMP뉴스.
https://www.km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588
(2) 익생양술. (n.d.). 승열탕(升熱湯). 익생양술.
http://www.iksaeng.com/prescription/predong_One.jsp?prescription=srjaly3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