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 <사도>를 보면 정말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저리 매정하게 죽으라고 할 수 있는가? 뒤주에 가두는 행위가 정말 실제 역사에서 가능한 일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고는 합니다. 정말 진짜인지 기록을 찾아보겠습니다.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대조(영조)께서 전부터 선원전에 가시는 길이 두 길인데, 만안문(동문)으로 드실 때는 탈이 없고 경화문으로 들어오시면 탈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화문으로 가자 하셨다. (중략) 그날 대들보에서 부러지는 듯이 대조의 행차 소리를 들으시고 탄식하셨다. "내가 죽으려나 보다. 이게 웬일인고!" 영조는 사도사제를 뒤주에 가두려고 했던 그날, 탈이 많을 때 드나니는 경화문을 통과하였고, 큰 소리를 듣고 사도세자는 죽음을 직감했습니다. (1)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고, 사도세자는 용포를 입었다고 합니다. 머리에 쓰는 세손(정조)의 방한구를 달라고 하자 사도세자의 방한구를 가져오라고 혜경궁 홍 씨가 그랬다고 한다. 그 상황을 본 사도세자는 부인인 혜경궁 홍 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을 데리고 오래 살려하고 (중략)" (2)
그리고 충격적인 문구가 다음으로 나오게 됩니다. "대조(영조)께서 휘녕전에 앉으시어 칼을 안으시고 두드리시며 그 처분을 하시게 되니....(중략)" 그다음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 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한번 나경언(羅景彦)이 고변(告變) 한 후부터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이에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고, 이어서 동궁의 대명(待命)을 풀어주고 동행하여 휘령전(徽寧殿)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나 세자가 병을 일컬으면서 가지 않으니,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趙榮進)을 특파(特罷)하고 다시 세자에게 행례(行禮)하기를 재촉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휘령전(徽寧殿)으로 향하여 세자궁(世子宮)을 지나면서 차비관(差備官)을 시켜 자세히 살폈으나 보이는 바가 없었다.
세자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 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 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하고,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 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 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라도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신 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鄭翬良),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肇)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진언(陳言) 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 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서도 세손이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달라고 호소하였으나 "나가거라"라고 엄하게 말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신만·홍봉한·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躋)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하고, 이에 전문(殿門)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사서(司書) 임성(任晠)이 말하기를, "일이 마땅히 다시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暎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 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 5월 21일 계미 2번째 기사 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훙서(薨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 세자(思悼世子)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 포(黲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한 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이미 처분하였은즉 빈궁(嬪宮)은 효순(孝純)과 같으니, 구인(舊印)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혜빈(惠嬪)이란 호를 내려 일체로 옥인(玉印)을 내리고, 조정은 정후(庭候)하라." 하였다.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어떤 감정 표현도 없이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붙였습니다. 이후로는 사도세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어찌 이리 감정도 없이 이야기할 수가 있는지 왕이 되면 이렇게 사람이 매정해질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건 정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는 모습을 직접 목도하고 자신이 어떻게 막으려고 하였으나, 할아버지 영조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죽는 과정을 직접 목도하고 영조가 아버지를 대하는 것을 모두 보았음에도 당시에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던 정조대왕은 영조가 승하하고 난 이후, 정조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그날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윤음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 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하겠다." 하였다.
- 출처 -
(1) 한중록, 혜경궁 홍씨 저자(글) · 신동운 번역, 스타북스, 172p
(2) 한중록, 혜경궁 홍씨 저자(글) · 신동운 번역, 스타북스, 1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