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독립문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독립문이라고 하면 일본 제국으로부터 자주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 세운 건축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독립문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 아닙니다. 내신이나 수능 시험에서 종종 등장하는 독립문에 대한 이야기,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사실 독립문이 있었던 자리에는 원래 영은문이라는 문이 있었습니다.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 맞이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기록에 의거하면 1537년에 증축되어서 1895년에 헐렸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죠. 사대주의는 '큰 나라를 섬기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19세기에는 영은문이 일종의 청나라를 사대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 내용은 1882년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내용 중 일부>
"조선은 오랫동안의 번방(藩邦)으로서 전례(典禮)에 관한 것에 정해진 제도가 있다는 것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다. 다만 현재 각국(各國)이 수로(水路)를 통하여 통상하고 있어 해금(海禁)을 속히 열어, 양국 상인이 일체 상호 무역하여 함께 이익을 보게 해야 한다. 변계(邊界)에서 호시(互市)하는 규례도 시의(時宜)에 맞게 변통해야 한다. 이번에 제정한 수륙 무역 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이며, 각국과 일체 같은 이득을 보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 이에 각 조항을 아래와 같이 정한다." 물론 이 내용은 조일수호조규, 즉 일본과 조선이 체결한 강화도 조약의 내용 중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내용을 겨냥한 내용이기는 합니다. 당시 한반도는 어떤 열강이 먼저 뽑아 먹냐는 이권다툼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청나라 중 누가 조선을 점령할 것인지의 외교 전쟁 중 한 편의 모습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청나라에 대한 속방, 속국이라는 내용이 만연하게 있던 19세기 당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1895년 2월 갑오개혁 내각회의에서 박영효는 자주독립의 의지를 세계 만국에 천명하기 위해 영은문을 헐어버리자고 제의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김홍집과 박정양 등은 영은문 제거에 동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 이후 서재필 박사는 철거된 영은문의 주춧돌을 바라보는 자리에 독립을 상징하는 건물을 세우자고 주장합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서 독립문 건립 운동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착공식)이 열리게 되죠.
독립문 정초식은 정말 성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독립 협회 회원과, 일반 시민, 정부 대신, 외국 공사와 외빈 등 5,000 명에서 6,000 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후원금은 약 5,897원 정도 모았다고 합니다. 총공사비가 3,825원이 소요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보았을 때 후원금이 굉장히 많이 모인 것이죠. (2)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독립관 연회 말. 지나간 토요일 오후 2시 반에 독립문 주춧돌 놓는 예식을 독립공원 땅에서 시행하였는데, 일기도 매우 좋거니와 각색 일이 절차가 있게 되어 갔고 사람이 내외국민 아울러 5,6천 명이 왔더라. 독립문 들어가는 데는 푸른 나무로 홍예를 만들어 조선 국기로 좌우를 단장하고 문 위에는 흰 바탕에 붉은 글자로 ‘독립문’이라 써 높이 달고 문에는 독립 협회 기를 훌륭하게 만들어 바람에 흔들리게 하였으며, 청한 손님들 있는 밖으로는 목책으로 울타리를 하여 그 안에 정부 높은 관원들과 각 학교 학원들과 외국 공∙영사와 그 외 외국 신사들과 여러 외국 부인네들이 많이 앉고 서고 하였으며, 새로 세우는 (독립) 문의 주추를 벌써 높이 모았는데, 좌우에 넉자 높이까지 돌로 쌌는데 한편은 회장과 연설하는 사람들과 기도하는 교사가 섰고 또 한편은 배재 학당 학도들이 섰더라. 단 밑으로는 앞문까지는 각 관립학교 학도들이 섰고, 영어 학교 학도들은 길 들어오는 좌우에 벌여 서서 보기에 매우 정제하더라. 회장 안경수 씨가 예식을 열고 배재 학당 학도들이 조선가를 부르고 회장이 주춧돌을 놓고 교사 아펜젤러 씨가 조선 말로 하나님께 축수하되, ”조선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께서 성체가 안 강하시고 조선 독립이 몇 만 년을 지나도 무너지지 않게 되며 조선전국 인민이 점점 학문이 늘고 재산이 늘어 새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더라.
독립신문(The Independent) 1896년 6월 20일 자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문은 그렇게 영은문의 주춧돌을 바라보며 완공되었습니다. 모습이 프랑스 개선문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재필이 실제로 프랑스 에투알 개선문을 본떠서 건축했다고 하니 비슷할 수밖에 없죠.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리면서 조선은 자주국임을 천명하였으나, 이후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으로부터 빼앗기는 을사늑약을 체결되고, 1910년 경술국치가 불법적으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면서 일제강점기 35년이 시작하게 됩니다.
- 출처 -
(1) 李瑄根, ≪韓末近代法令資料集≫, 1∼462쪽 참조.
(2) 국사편찬위원회. (25.10.27). 독립문 건립. 『한국사연대표』, 개화와 자주독립운동 편. 서울: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