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009. 해방 당시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여운형
"작년 1918년 11월에 대전이 끝나고 상해의 각 사원에는 평화의 종소리가 울리었다. 우리는 신의 사명이 머리 위에 내린듯하였다. 그리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동지 김규식을 파리에 보내고 3월 1일에는 내지(內地)에서 독립운동이 돌발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곧 대한민족이 전부 각성하였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 연설 中, 한국독립운동지혈사 中
위 연설은 몽양 여운형이 도쿄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한 연설 내용 중 일부이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이후 당당히 일본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부르짖은 담대함은 정말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이 든다. 여운형 선생님은 해방 당시 조선인들의 막대한 지지를 받은 민족 지도자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한반도를 벗어나 국외에서 투쟁을 이어나갔지만, 여운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활동했다. 특히나 1944년 8월 10일에 결성한 건국동맹은 비밀결사 단체로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을 교과서와 여러 시험에서도 언급되는 단골 출제 내용이다.
오죽 일제에서도 여운형에 대한 인기와 명망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일제 패망을 앞둔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을 찾아가 일제 패망을 미리 알리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일본 본토로 움직일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하였습니다. 물론 앞서 여러 인물들한테도 요청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여운형은 달랐습니다. 여운형은 행정권을 이양받는 대신에 3개월 분의 식량을 확보할 것,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대해서 무간섭을 하라는 등의 조건을 걸었습니다. 최소한의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재원과 시간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존에 있었던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치안대를 조직하고 한반도 내의 치안 공백을 메꿨습니다.
이런 여운형 선생님의 행보는 조선인들의 감동과 마음을 빼앗는 매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구회에서 1945년 1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는 누구인가라는 조사에서 33% 지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뒤로 이승만 대통령이 21%, 김구 선생님이 18%, 박헌영이 16%로 뒤를 이었습니다. 또한 대표적 조선 혁명가는 누구인가라는 조사에서는 여운형이 20%, 이승만 18%, 김구 16%, 박헌영 17%를 받으며 여운형의 당시 인기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여운형 선생님을 아냐고 물어보면 갸우뚱 고개를 돌리는 상황과는 많이 대비되는 면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행보로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좌우 합작운동의 실패로 야기된 남북 분단의 현실화와 더불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섣부르게 건국한 이유로 민족주의 계열들이 대거 이탈하며 반쪽짜리 정부가 되었다는 점은 아쉬운 행보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모두는 다 결과론적인 해석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고 해서 여운형을 지금의 북한과 관련된 인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서 미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당시에 인민은 국민과 구분되는 다른 단어였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인민은 사람들을 묶는 하나의 단어였습니다. 반면 국민은 국가에 속한 구성원으로 쓰였죠. 1947년 조선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호를 정하는 질문에 24%가 대한민국, 70%가 조선인민공화국을 골랐다는 점에서 당시 국민들이 인민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인민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위쪽 동네 정치인들이 하도 인민이라는 단어만 고집해서 사용하다 보니, 지금 사회에 이르러서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면 그쪽이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도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