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002. 10년 이상 조선에서 살았던 코끼리
코가 길고 덩치도 매우 커서 눈에 매우 잘 띄는 코끼리, 지금 우리가 봐도 신기하고 크기에 압도당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 코끼리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2월 22일 계축 2번째 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지(源義持)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斗)씩을 소비하였다. (○日本國王源義持, 遣使獻象。 象, 我國未嘗有也。 命司僕養之, 日費豆四五斗。)
태종 이방원 집권기인 1411년, 무로마치 막부 시대 제4대 쇼군으로 알려져 있는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조선에 코끼리를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코끼리를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복시란 여마와 구목,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한 관서라고 합니다. 약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느낌이기는 한데, 여기서 여마(輿馬)란 왕이 타는 수레를 끄는 말을 의미하고, 구목(廐牧)은 국가에서 사용할 말을 의미합니다. 마땅히 코끼리를 키울 국가부서가 없는데, 타국의 선물로 온 동물이라 방치하기에는 애매하여 사복시라고 하는 관서에서 코끼리를 기르기로 한 것입니다. 다만 날마다 콩을 4두에서 5두 씩을 소비한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상당히 많이 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2월 10일 신유 6번째 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을 바치므로 3 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前工曹典書李瑀死。 初, 日本國王遣使獻馴象, 命畜于三軍府。瑀以奇獸往見之, 哂其形醜而唾之, 象怒, 踏殺之。)
여기서 순상은 길들여진(순) 코끼리(상)라는 뜻입니다. 코끼리를 키운 지 2년이 되지 않아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공조 전서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생각하여 코끼리에게 침을 뱉었고, 화가 난 코끼리가 밟아 죽였다고 합니다. 21세기에 와서 우리는 코끼리가 대단히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저런 행위를 하면 코끼리가 화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당시에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1월 5일 신사 4번째 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코끼리[象]를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進言)하였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 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玩好)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故事)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소서."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命置象于全羅道海島。 兵曹判書柳廷顯進言曰: "日本國所獻馴象, 旣非上之所玩, 亦無益於國, 觸害二人。 若以法論, 則殺人者當殺, 又一年所供芻豆, 幾至數百石。 請倣驅犀象之(象)〔事〕 , 置于全羅海島。" 上笑而從之。)
9개월이 지난 태종 13년 11월 5일, 국익에 이롭지도 않고, 밥만 축내는 동물이라고 코끼리를 비판하면서 공조전서 이우가 밟혀 죽은 것을 언급하며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이 마땅하다고 언급합니다. 전라도 해도로 보내버리자고 임금에게 건의를 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이방원은 이를 웃으면서 그대로 따른 것을 보면 코끼리가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전라도 해도는 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에 위치한 장도공원인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동물이 귀양을 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5월 3일 을해 4번째 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길들인 코끼리[象]를 육지(陸地)로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에 방목(放牧)하는데, 수초(水草)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瘦瘠)하여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불쌍히 여겼던 까닭에 육지에 내보내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였다.
-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2월 28일 임술 2번째 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3월 14일 병자 5번째 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충청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공주(公州)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차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하였다. 선지(宣旨)하기를,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하였다.
전라도 장도로 유배된 이후 코끼리는 풀이 없는 까닭으로 때 아닌 단식을 하게 되었고, 수척해졌다고 합니다. 이후 이를 불쌍히 여겨 태종은 육지로 다시 코끼리를 이동시키라고 하였는데요. 코끼리가 먹는 양이 너무 많아 특정 지역에서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하소연하여 세종대왕 시기 전라도 관찰사가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돌아가면서 코끼리를 책임지자고 건의하였고, 세종대왕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전라도 한 지역에서만 책임지기에는 코끼리가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게 문제였다는 것이죠.
조선왕조실록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코끼리와 관련된 기록은 세종 3년의 기록입니다. 충청도 차례가 되어 기르고 있었던 상황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주 지역에 코끼리를 키우는 종이 죽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또 많이 먹는다고 하소연이 언급되는데요. 결과적으로 코끼리는 다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코끼리와 관련된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코끼리는 섬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10년 이상 조선에서 코끼리가 살았다는 점,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