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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태조 이성계는 왜 파란 용포를 입었을까?

『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by 박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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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태조 이성계의 어진, (우) 영조의 어진 공공누리 1 유형

003. 태조 이성계는 왜 파란 용포를 입었을까?


여러분 한번 조선의 국왕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아마 빨간 곤룡포를 입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금의 모습이 떠오를 겁니다. 실제로 국왕의 얼굴을 본든 어진이 몇 점 남아있는데요. 남은 어진을 보면 전부 빨간 곤룡포를 입고 있습니다. 반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파란 곤룡포를 입고 있는데요. 왜 이성계만 파란 곤룡포를 입고 있는 것일까요?


TMI) 조선과 초상화

一毛一髮不相似 便非其人. 일모일발불상사 변비기인이라고 읽는 이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올의 머리카락, 한가닥의 털만큼이라도 닮지 않았다면 그것은 진짜 그 사람이 아니다." 당시의 초상화를 대하는 조선인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一毛一髮不相似 便非其人 이 문장은 중국 북송 시대의 유학자 정이가 밝힌 초상화에 대한 의견입니다. 이 문장은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조선에 초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


TMI) 곤룡포의 의미

곤룡포란 왕이 집무 시에 입던 정복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복은 공식 행사 및 상황에서 입는 복장을 말합니다. 좀 더 자세히 의미를 살펴보면, 곤룡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곤룡이란 구불구불한 용이라는 뜻이며 포는 의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곤룡포란 구불구불한 용이 표현된 옷이라는 의미이죠. 2)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태조 이성계가 파란 곤룡포를 입은 이유는 정확히 모릅니다. 제가 너무 아쉽고 답답한 부분인데, 14세기의 역사이다 보니 많은 기록이 소실되고 없어진 것 같습니다. 대신 여러 설들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그 내용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고려가 푸른빛을 숭상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이 주장은 제가 한 것은 아닙니다. 숙종과 영부사 김수흥의 대화에서 이 주장이 언급되어 있는대요. 언급된 내용부터 보겠습니다.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4월 8일 경술 1번째 기사

강교에서 태조 대왕의 영정을 맞다

임금이 강교(江郊)에 나가서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영정(影幀)을 공경히 맞이하여, 자정전(資政殿)에 모시고 들어가서 봉심(奉審)한 뒤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정이 첨배(瞻拜)한즉 태조 대왕께서 입은 곤의(袞衣) 빛깔이 푸르니, 예복(禮服)이 아닌듯하다. 혹시 국초(國初)에 복색(服色)을, 푸른 빛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하니,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이르기를, "‘고려(高麗)에서는 푸른 빛을 숭상하였다.’고 하니, 태조조(太祖朝)는 고려와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푸른 빛으로 곤의(袞衣)를 만들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임금이 이어 영소전(永昭殿)에 거둥하여 인경 왕비(仁敬王妃)의 신위(神位)에 전배(展拜)하고 해질녘에 환궁하였다.


1688년 당시에도 태조 이성계의 어진 속 파란 곤룡포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영부사(영중추부사의 줄임말이며, 조선의 행정관청으로서 자문 역할을 수행한다고 한다.) 김수흥은 태조 이성계가 시기 상으로 고려가 없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고려가 숭상했던 파란색일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2. 명나라의 입김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9일 무인 1번째 기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전 밀직사(密直使) 조임(趙琳)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리게 하였다.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신(臣) 아무는 말씀을 올립니다. (중략) " 여기서 권지고려국사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권지국사는 왕호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에 사용하는 왕의 임시 칭호입니다. 따라서 권지고려국사는 고려의 임시국왕을 뜻하는 것이죠. 태조 이성계는 자기 자신을 고려 국왕이라고 명나라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기록이 파란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 태조의 어진입니다. 조선 초기 명나라가 파란색 곤룡포를 주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사실로 추측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일각에서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태조 이성계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을 하지 않았기에 임시 고려 국왕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상징색인 파란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3. 음양오행에 근거하여 색을 지정한 것이다.

또한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음양오행에 근거하여 방위에 색깔을 입힌다면 중앙은 황색 북쪽은 검은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붉은색, 동쪽은 푸른색이라고 합니다. 중앙에 위치한 명나라는 황제국으로서 황색의 곤룡포를 입고, 동쪽에 위치한 초기 조선은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겁니다. 그런다 후에 정식으로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받으며, 대명회전에 의거하여 대홍색의 곤룡포를 입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은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색보다 용보(곤룡포 가운데 그려진 용의 그림을 말합니다.) 안에 있는 용의 발톱 개수가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5개의 발톱이 있으면 오조룡, 4개면 사조룡, 3개면 삼조룡이라고 하였습니다. 발톱이 많을수록 왕의 권위가 높았다고 합니다.


또한 곤룡포와 관련하여 이성계가 빨간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이유들로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붉은 곤룡포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세종 때부터 나옵니다. 대홍색이라고 당시에는 불렀는데, 대홍은 새빨간 색을 의미합니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3월 26일 병자 2번째 기사 (1444)

사은사(謝恩使) 유수강(柳守剛)이 칙서(勅書)와 관복(冠服)을 싸 가지고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니, 왕세자(王世子)가 군신을 거느리고 오리정(五里亭)에서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중략) 저사 대홍직금 곤룡암 골타운포(紵絲大紅織金袞龍暗骨朶雲袍)· (중략)


이를 까닭으로 사람들은 대략 세종 시기부터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이후부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는 황제를 의미하는 황색 황룡포를 입으며 변화를 주기 전까지 말입니다.



- 출처 -

1) 천연두부터 털 한 올까지 섬세함 속에 인간의 정신을 그리다, 국가유산청,

https://www.khs.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Y4PodsVZznCcglKAG1kHlWKVG29BNZGsZpeWsBgRrKsoytTIJwyIhNOa3V2wZWhi.cha-was01_servlet_engine1?nttId=61227&bbsId=BBSMSTR_1008&pageIndex=83&pageUnit=10&searchtitle=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dept=&searchWrd=&searchCn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 2025.09.06


2) 한복사전 곤룡포, 전통문화포털,

https://www.kculture.or.kr/brd/board/1077/L/menu/1067?brdType=R&thisPage=1&bbIdx=222&searchField=title&searchText=%EA%B3%A4%EB%A3%A1%ED%8F%AC, 202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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