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004. 경복궁 중건의 진실
중학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지시했다. 경복궁을 다시 만들기 위해 막대한 양의 화폐를 발행하였고, 백성들을 동원한 결과 조선의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에 빠졌고, 백성들의 민심은 바닥났다." 많이 들어본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이게 진실 그 자체의 내용일까요? 실록과 기록 속의 경복궁은 어떻게 복원되었을까요?
경복궁 중건의 첫 시작은 대비의 말에서 시작됩니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 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규모가 바르고 크며 위치가 정제하고 엄숙한 것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우러러 볼 수 있거니와 정령(政令)과 시책이 다 바른 것에서 나와 팔도의 백성들이 하나같이 복을 받은 것도 이 궁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중략) 이 궁전을 다시 지어 중흥의 큰 업적을 이루려면 여러 대신들과 함께 타산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음식을 내린 다음에도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은 머물러서 기다리라." 하였다.
희안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대왕대비가 명한게 아니라 흥선대원군이 명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록에서는 대왕대비(신정왕후)가 명했다는 내용으로 나오니 말입니다. 찾아보니 경복궁 중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신정왕호의 뜻을 받드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결제 시스템을 따라 진행을 한 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고종 2년 4월 3일 경복궁 영건도감(영건은 궁궐의 건축을 관장하는 임시부처라는 뜻입니다.(경복궁 영건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경복궁 중건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을 찾았습니다.(1)
"이번에 옛 궁전을 중건하는 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불러오고 나라를 위하여 번창해지게 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공사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드는 일이다. 백성들에게 내게 하자니 정녕 너무나 애처로워 이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어제와 오늘 이틀 사이에 모인 원납전(願納錢)이 10만 냥(兩)에 달하고 선파(璿派)들이 보조한 돈도 몇만 냥이 넘는다고 한다. (중략)
"대원군은 고종 2년(1865) 4월에 營建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스스로 진두에서사업을 지휘하였다. 이 공사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대원군은 우선왕실로부터 內帑金 11만 냥을 지출하고, 종친을 내세워 願納錢 36만 냥을걷도록 하였다. 이어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원납금을 염출케 하였다. 경복궁중건에 사용된 개인 원납금의 총액은 1865년 4월부터 1868년 8월까지 약 750 만 냥이었다."
- 成大慶,《大院君政權性格硏究》(成均館大의 博士學位論文, 1984), 87쪽-
경복궁 중건 사업을 실시하자고 한 날이 고종 2년 4월 2일입니다. 그런데 4월 5일, 단 3일 만에 원납전이 10만 냥이 걷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조선의 당시 행정력으로 저렇게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원납전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기부라는 포장을 덮은 세금입니다. 이름의 뜻은 "원해서 납부하는 돈이지만" 백성들은 "원망하면서 납부하는 돈"으로 해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전은 또 있습니다.
"경향(京鄕)의 많은 백성들이 부역(赴役)을 자원하여 구름같이 모여들었다."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이 궁궐을 건축하는 것에 대하여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축원하였기 때문에 즐거이 부역을 하게 된 것이니, 옛날에 이른바 서민들이 자식처럼 와서 수고로움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민심은 바로 천심(天心)입니다." (중략) "역사(役事)를 하는 곳을 직접 시찰하겠다. 대신 이하는 수행하라. 모든 대신들은 다 부역을 하는 백성들의 실상을 보았는가?"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과연 진심으로 기뻐하며 공사에 동원된 것을 더없이 줄거워하는 것을 통하여 백성들의 심정을 충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하자, 하교하기를,"백성들의 선량한 마음이 참으로 본래 이러한 것임을 오늘에 더욱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가 기록의 진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고종실록이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저 말 그대로를 해석하면 백성들이 초기에는 경복궁 중건 사업에 대단히 호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발생합니다.
1866년 3월 5일 경복궁 영건일기 中
"오늘 2경 무렵 동십자각 근처에 있는 훈련도감 화공의 가가에서 불이 나서 나무를 다듬는 가가 800여 칸과 다듬어 놓은 목재까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계속해서 불 끄는 것을 감독하고 신척하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중략)" "야간 경비를 하는 병졸도 있었으나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앉아서 불이 번지는 것을 구경만 하였으니 (중략) 파면하는 형벌을 시행하고, 불이 난 곳을 지키던 군졸들을 형조에 회부하여 엄히 형신한 후에 유배 보내도록 하겠습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중략)"
1867년 2월 6일 경복궁 영건일기 中
"총가목이 이번 불이 났을 때 모두 타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 (중략)"
대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크고 작은 화재는 물론 여러 번 있었지만, 대화재 또한 2차례 이상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1866년 3월 5일입니다. 중건 사업 시작일이 1865년 4월 2일이니 11개월 만에 발생한 대화재입니다. 이 화재로 인하여 800칸이 불탔다고 합니다. 여기서 1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로서 1칸은 대략 2.4m 정도로 우리 기준으로 1평 정도로 생각하면 가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3) 계획된 경복궁의 규모는 7,450칸이기 때문에 전체 대비 10.7%가 타버린 것이고, 과거 태조 이성계 시기에 완공된 경복궁의 규모가 755칸인 것을 감안하면, 초기 경복궁을 전부 태워버린 대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서 비롯된 총체적 문제가 바로 자금난, 인력난인 것이고 대원군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고 마구 유통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조선의 경제는 붕괴되고, 초인플레이션에 빠지게 됩니다. 자연스레 민심은 추락하고 백성들은 경복궁 중건에 대한 반발심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노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경복궁 타령>입니다.
<경복궁 타령>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 온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을축 4월 갑자일에 경북궁을 이룩하세.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도변수(都邊手)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단산봉황(丹山鳳凰)은 죽실(竹實)을 물고 벽오동 속으로 넘나든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남산하고 십이 봉에 오작(烏鵲) 한 쌍이 훨훨 날아든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왜철쭉 진달화 노간죽하니 맨드라미 봉선화가 영산홍이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조선 여덟도 유명 탄 돌은 경북궁 짓는 데 주춧돌감이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근정전을 드높게 짓고 만조백관이 조하(朝賀)를 드리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이후 꾸역꾸역 경복궁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임금은 경복궁으로 이어(왕이 거처를 옮김)하였으나, 경복궁이 불편한 것인지는 몰라도 경복궁 뒤편에 건청궁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1873년) 이후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을 겪으며 경복궁은 역사의 폭풍 속으로 들어갔다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한국을 자랑하는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백성들의 피와 땀을 통한 건축이었지만, 작금의 현대에 와서는 칭송받는 역사 유적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경복궁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경복궁 복원 사업이 속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출처]
(0). 경복궁 근정전, 국가유산청 경복궁관리소, 공공누리 1 유형
(1). 서울특별시. (2023, 6월 21일). 경복궁 중건 사업 본격 시작 [보도자료]. 서울시 미디어허브.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08034
(2).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조선고적도보 10(朝鮮古蹟圖譜 十) 공공누리 1 유형
(3). 한국부동산원. (2021년 1월). 한옥의 구조가 낳은 한국 가구의 고유성. KIRA Month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