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생기는 역사』
006. 갑신정변, 실상은 더 끔찍하다.
"김홍집을 필두로 한 온건개화파와 김옥균을 필두로 한 급진개화파의 대립과 김옥균의 차관 도입 실패, 일본의 지원 약속과 더불어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청나라의 조선 주둔군 철수를 배경으로 우정국에서 거사를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로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한성조약과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배운 갑신정변의 내용입니다. 필자는 항상 이 짧은 한 단락을 읽으며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왕을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김과 동시에 3일의 실권을 잡는 이 과정은 결코 시간은 3일이라도 그 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 너무 많이 생략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항상 들었죠. 이제 그 질문에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도대체 갑신정변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날 밤 우정국(郵政局)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洪英植)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閔泳翊)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凶徒)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金玉均)·홍영식·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闕內)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寢殿)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移御)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日本公使)에게 와서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
김옥균(金玉均) 등이 생도(生徒) 및 장사(壯士)들을 시켜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 총관(海防總管) 민영목(閔泳穆), 내시(內侍) 유재현(柳載賢)을 앞 대청에서 죽이게 하였다.
상께서 연거푸 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 고 하교하시는 말씀이 있기까지 하였으나, 명을 듣지 않았다. 이때 상의 곁에는 김옥균의 무리 십수 인만이 있었는데, 상이 행동을 자유로이 할 수 없게 하였고 심지어는 어공(御供)도 제때에 하지 못하게 하였다.
박은식의 한국통감을 보면 갑신정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이 3개의 정당이 투쟁과 내분이 그치질 않으니, 친일파들이 개혁을 통해 친청파와 친러파를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1883년 11월, 김옥균은 차관(타국으로부터 금전을 빌려오는 행위)을 빌리는 빌미로 일본으로 건너가 개혁을 소개하였고, 일본은 임오군란 배상금 중 40만 원을 탕감하여 지원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1884년 9월이 되자 다케조에가 조선으로 건너가 중국이 월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으니 조선에 신경을 쓸 수가 없을 것이라고 힌트를 제공하였고, 김옥균은 이를 듣고 친일파 인물들과 의논하였습니다.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현 우체국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개국 축하연회를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육조판서와 내외 아문의 독판(현 장관급)과 4 영의 책임자들(영은 수방사와 같은 군부대를 뜻한다.), 미국 공사 푸트와 영국 영사 애스톤, 청국 영사 진수당 등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일본 공사는 아프다는 이유로 참석을 안 했다는 점이 지금으로서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연회가 시작되자 홍영식 등이 사관생도와 함께 경운궁과 궁궐 문 앞에 매복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개혁 시작은 자객이 우정국 하수구 쪽에서 방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밤 10시에 불이 붙었습니다. 민영익은 불을 끄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자객이 바로 덮쳐 그를 찔렀습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은 즉시 대궐로 뛰어갔습니다. 대궐의 문은 내통 중인 궁녀의 도움으로 열려있었다. 그들은 왕을 모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더불어 왕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본 공사에게 요청하여 일본 주둔군으로 엄호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장관급 인사로 개화파(친일파) 인물들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세게(위안스카이)가 군대를 몰고 들어와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을 구출하며 친일파의 개혁은 끝이 나고 납니다.
사실 급진개화파 사람들은 일본 군함이 곧 올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 일본은 급진개화파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없었죠. 그들은 그저 조선을 맛있게 자기들 식민지로 만들 생각만 있지, 이들을 강대국으로 발전하게 하기 위해 급진개화를 지원해 줄 필요는 없었죠. 그래서 일본군 군함은 나타나지 않았고, 급진개화파는 머리를 밀고 양복을 입힌 체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고종은 환궁 이후, 급진 개화파 이들이 임명한 인사조치를 전면 무효화 시킴과 동시에 개화파 인물들을 모두 내쫓게 됩니다. 결국 고종 곁에는 아첨꾼만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갑신정변을 통해 조선의 최종 인공호흡기가 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남은 개혁의지마저 이 날 끊긴 것이죠. 이들에게 남은 건 고종과 아첨꾼이라면 국가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김옥균은 최후를 비참하게 맞이하였습니다. 청나라에서 자객에게 암살당하며 끝이 났죠. 더불어 김옥균은 사상 최악의 형벌을 받아 여러 부위가 여러 도시에 걸리는 최악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박은식 선생님은 한국통사에서 급진개화파의 머리를 칭찬하였으나, 너무 어려 경험이 없다는 점을 필두로 여러 근거를 들어 갑신정변의 아쉬움을 언급하였습니다. 저 또한 이들이 경험을 많이 해본 상태에서 개혁을 일으키고 실제로 이들의 세상이 구현되었다면, 작금의 한국 역사는 또 어떻게 발생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진실은 그 누구도 모를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