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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Nov 23. 2024

Body to Soul, 그 해 여름 서울_#1.

본격 연애 소설 연재_여름의 시작, 누군가의 떠남.

오후 7시 14분.


Y가 곧 퇴근하여 귀가할 시간이고, 그와의 저녁식사를 마친 후 마저 할 일들을 하기까지는 약간 여유가 있는 상황.


종일 후덥지근했고, 고객사에 보낼 제안서 작업을 하느라 K의 머리는 수분 빼낸 두부처럼 탄력 없이 으깨진 상태.


무위도식, 유유자적. 그것만이 간절한 잠깐의 늘어짐.


K의 13년 광고회사 경력은 '프리랜서 마케터'라는 지금의 직업으로 귀결됐다. 회사생활이 10년을 넘어가며 자연스레 술이 늘었고 수면제 복용이 일상화되었으며 공황장애 진단이 마치 생리 전 일어나는 피부 뾰루지처럼 놀랍지 않게 추가되었다.


배가 고파 식당을 들어서듯, 이 일련의 과정들은 자연스레 퇴사로 이어졌고, 그 시간을 거쳐 지금 K는 집에 드러누워있다.


처음 프리랜서가 되고서는 늘어지지 않는 긴장감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위워크같은 공유오피스를 가기도 하고, 따로 오피스텔을 얻어 작업실을  만들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일단 돈도 아깝고 무엇보다 '노동'을 위해 몸을 일으켜 이동하는 그것은 그토록 지긋지긋해하던 출근의 연장선상이 된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게다가 이제는 따박따박 월급들어오는 삶이 아니다.

그렇게 생활과 노동의 공간이 일체화 되었다.


급한 일들을 마쳐놓고 널브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늘 생각한다.


'지금 회사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프리랜서 생활이 이어지면서 지금이 몇 월인지, 무슨 요일인지에 대한 시간 감각이 희미해졌다. 요새 들어 종종 못 견디게 몹시 더울 때가 잦아지는 것을 보니 계절이 바뀐 듯하다.


정 못 견딜 정도면 잠깐 에어컨을 틀어 땀만 식히고 나서 얼른 끄는 식이다 보니 집 안 전체에 후끈한 기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대충 여름이 오나보다라고 생각만 한다.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그는 퇴근한다. 그가 현관에 들어서면 주섬주섬 일어나 맞아주고 간단한 포옹을 한 후 그는 곧장 샤워를 했다. 일종의 퇴근 의식 같은 것이었다. 서로를 안는 손길이나 포옹의 밀착감에 뜨거운 욕망 같은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햇빛이 비치면 커튼 치는 식의 관성적인 행위였다.


생각 없이 누워있기를 한 얼마 후, 번호키의 누름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들려오고 그가 들어선다. 그의 퇴근 의식을 위해 일어서려 하지만 그날따라 몸이 일으켜지지 않아 그냥 목소리만 높여 ‘왔어? 수고했어요.’를 말해보지만 대답은 따로 없다.


마치 얼굴을 유화물감으로 마구 흩트려놓은 것처럼,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가 들어와 매트리스 끝에 앉는다.


‘왜 무슨 일 있었어? 힘들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래? 얘길 해야 알지.’


때로 냉정함이 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T성향의 K에게 때때로 감성이 흘러넘쳐 이성적 사고력가 현저히 낮아지거나 애초 거세된 사람처럼 굴기도 하는 전형적 F인 Y의 성격은 종종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 으레 발생하는 정기적 감성과잉의 날인가 싶어 관심과 공감은 배제되었지만 시간의 힘이 작용한 학습된 노력이 담긴 질문들을 더 던졌지만 Y는 그 색이 마구 뒤섞여 버린, 무슨 생각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저을 뿐.


‘안 되겠어. 도저히.. 그만하는 게 좋겠어.’


여린 Y의 성품, 자격지심, 열등감 등은 K를 지치게 했었다. 누군가에겐 분명한 헤어짐의 이유가 될 여러 가지들이 있었음에도 헤어지지 않았다.


미치게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혼자 남겨지는 상황과의 대면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스스로를 잘 알기에 헤어짐이 아닌 견딤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7년을 함께했다.


그 7년의 시간, Y의 풍성한 감수성은 몇 가지의 뻔한 문제들을 일으켰다.


남자의 뻔한 욕구로 인한 하룻밤 또는 꽤 긴 기간 동안 이어진 사고들.


사고라 말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예측가능한 것들이었다.


외부에서 보기엔 일 잘하고, 똑똑한 도시 여성 그 자체의 K 었지만, 연애 앞에서는 한없이 무지했고 약자였다.


악취 나고 부패해서 여기저기 곰팡이가 옮겨 붙은 관계보다 아무것도 없는 외로움을 마주하는 것이 더 두려운, Y보다 더 나약한 존재. 그것이 K 었다.


실체조차 잘 모르는 외로움에 정말 대적해 본 경험조차 없는 헛똑똑이.


K는 그런 사람이었다.


경제적 능력도,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카리스마나 추진력, 생활력을 차치하더라도 연인 사이에 반드시 수반되야 할 깊은 신뢰감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Y였지만 많은 한국남자들처럼 그 역시 결혼과 아이를 원했고, 살림과 육아를 하며 돈도 버는 이상적 아내를 원했다.


그의 껍데기는 매력적이었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K가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 세대와 다를 바 없는 그것이 진절머리나 K는 더 생각해 보자는 말로 그의 여러 제안을 미루거나 무시하다 점차 지쳐 최근에는 ‘결혼을 왜 꼭 해야 하는 것인지, 아이를 왜 꼭 낳아야 하는지?’ 반문하며 그의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던 때었다.


결혼, 아이와 같은 주제가 나올 때마다 그는 무슨 표정인지 모를 뒤섞임의 그 얼굴을 했고 둘은 등을 돌리고 잤다. 이미 둘 사이에 '사랑, 약속, 감사'의 말들은 사라진 지 오래된 상태.


아마도 지난 크리스마스 때 공연을 보고 나오며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졸려 죽겠다'와 같은 어조로 교환했었다.


‘넌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고,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할지 자신이 없어. 내가 나갈게.’


여기서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K에게 2가지는 분명했다.

올게 온 것, 차라리 다행이라는 것.


혼자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한번 남겨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번이 그 연습을 드디어 제대로 해 볼, 일종의 정신적 유격훈련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순식간에 마무리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할래? 일단 중요한 짐만 갖고 나갈래?’

‘그럴게.’


그가 짐을 챙겨 나가기까지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3주 후, 이사업체가 찾아와 그의 모든 것을 가져갔다. 이제 집에는 뜯어진 벽지를 가리기 위해 그가 붙여놓은 스티커만이 유일한 흔적으로 남았다.


그마저도 이삿짐이 나가는 날 모두 떼어버렸다.


그는 소파와 테이블, 수납장 등으로 집을 채우길 바랐지만 K는 거부했었다.


‘정신 사납고, 있는 것을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지만, 그 너머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영원하지 않을 그와의 생활에 투자하거나 가꾸고 싶은 열정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더 준비되지 않은 너는 너보다 훨씬 인생에의 준비가 된 나를 버리고 갈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라는 의미의 그 어떤 준비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의 모든 짐을 실은 트럭이 떠나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이미 다 데자뷔처럼 머릿속으로 그리던 것이었기에.


찬바람이 불 던 시기 마지막으로 사랑을 말했고, 더운 바람이 불자 마지막을 맞았다.


그렇게 그 여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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