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한 남쪽 하늘이 아직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아직 출근 준비를 해야 할 때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침대에서 소파로 이동해 다시금 눈을 감는다.
갈라진 밤송이만큼 살짝 벌어진 창문 사이로 새어든 서늘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콧속을 간지럽힌다. 나는 만성 비염 환자이기 때문에 서늘함에 물어오는 건조함은 나의 콧속 뿐 아니라 지난 주 수목원에서 본 물푸레나뭇잎도 메마르게 할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을이다! 잔뜩 부풀어 오늘 경계심으로 다시 뜬 눈에 비친 풍경은, 웬걸, 예상과 달리 편안하다. 맥주 거품같은 구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드럽게 흘러가고, 구름의 움직임에 시선을 맞추니 이번에는 초콜릿 빛 여름 산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미끄러져간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압도했던 매미 합창 소리는 잦아들고, 익숙한 까치와 맷새의 듀엣이 아침을 재촉한다. 놓칠 수 없는 모기 날갯짓 소리 또한 적막을 침투한다. 나는 전기 모기채를 머리맡에 두고 적의 기습에 대비한다. 베란다에 놓아둔 화분 속의 연둣빛 난꽃은 서늘한 기운 속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흔린다. 창문 가까운 거실 한편에 놓아둔 어항에선 꼬리가 파란 구피가 시원해진 공기를 맛보려는 듯 고개를 물밖으로 내밀어 입을 벙긋거린다. 그 옆에는 나를 닮아 좁은 공간을 참지 못하는 첫째가 자기만 한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고 마룻바닥 위를 굴러다닌다. 다행히 어항까지는 좀 거리가 있다. 냉장고와 각종 가전제품들은 지잉 하는 소리를 내며 오늘도 근무 중 이상무 신고를 한다. 해가 높게 뜨면 다시는 열일하겠지만, 오늘 새벽 미동도 없는 선풍기 날개는 파업장에 아무렇게나 놓아 둔 곡괭이마냥 쓸쓸하다.
나는 가급적 눈을 편안하게 하려 애를 쓰며 오늘 출근하기 전 해야 할 일과, 출근해서 해야 할 일, 그리고 퇴근 후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다만 정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일과 일 사이에 찾아오는 상념을 굳이 내쫓으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 전부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겠어. 머릿속에 오늘 하루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정리될 즈음 하늘의 색과 옆 동네 아파트의 외벽 페인트칠 색이 비슷해지고, 먼 산등성이는 어둠 속에서 한 몸으로 섞여있던 하늘과 굿모닝 키스를 하고 작별한다. 눈앞에 천천히 말개졌고, 빛은 안쪽으로 침투하여 결국 실눈을 뜨게 만든다. 타닥! 모기를 잡았다. 나는 승리를 만끽하는 동시에 팔을 뻗어 엊저녁에 읽던 책을 집어든다. 한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운 좋게도 매우 맛있는, 혀에 감기는 문장을 발견한다. 감상은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얼마 남지않은 자유시간을 만끽하면서 다시금 눈을 감으려는데 어느새 일어난 둘째의 보드라운 팔이, 코맹맹이 소리와 함께 목에 감긴다. ”아빠 배고파요.“ 와이프도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비척비척 걸어나와 거실에서 합류한다. 평범한 도시 직장인의 가을은 이렇게 찾아온다. 내일은 비가 쏟아질 것이다. 와이프에게 파전을 부쳐달라고 해야겠다.
순식간에 글을 썼다. 교과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다. 마치 직원연수라는 시제를 받아들고, 한 붓으로 책문을 써 내려간 느낌이다. 조직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글을 마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야겠다.
”... 보잘 것 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하고 두렵지만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