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공감과 이별하기로 한다. ‘나만 그래? 넌 안 그래?’ 왜 그리 확인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확인을 받아야만 마음이 편해졌던 것 같다. 취업이 안 되는 현실에 대해, 상사의 무능력에 대해, 불합리한 결혼 문화에 대해. 어떤 주제든 상관없었다. 나의 개똥철학에 맞장구쳐줄 상대만 있으면 오케이였다. 그렇게 술 한 잔 하면서 실컷 떠들다 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물론 다음 날이면 출근과 함께 모든 것이 리셋되었다.
나에게 공감은 하나의 위로였다. ‘나도 그래,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말은 잔뜩 상기된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은 외로움이었나 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바다에 홀로 떠있는 기분이랄까. ‘나 여기 있는데, 너도 거기 있어?’라며 허공에 외쳐본다. 불안한 외침 끝에 ‘그래, 나도 여기 있어’라고 멀리서 메아리가 들려온다. 비로소 느껴지는 안도감. 너도 거기 있구나. 공감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토록 안도감을 주던 공감이 점차 공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딱히 없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홀로 바다에 떠있는 기분이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확인하는 걸로는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았다. 뭍으로 갈 수가 없는데 주변에 함께 빠진 사람들이 많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지인들과의 시간은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푸념과 한풀이의 시간일 뿐. 잠시 고통을 잊을 수는 있어도 근본 치료는 되지 않는 진통제와 같다. 치료제가 필요하다.
그래, 나에게 필요한 건 치료제이다. 그것도 아주 독한 치료제.
공감이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위로가 큰 효용이 없음도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치료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외면해왔을 뿐. 뭔 소리냐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해결책을 찾기보단 해결책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어렵냐며 하소연을 했다. 공감이란 이름으로 핑계를 찾았던 것이다. ‘그치? 해결책 찾는 건 불가능하지? 너라도 못하겠지?’ 이런 식이다. 그렇게 공감이란 면죄부를 얻고, 잠시의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그런 위안이 오래갈 리 없다. 반복되는 경험으로 찰나인 걸 알고 있었다. 억지로 외면해왔지만 더 이상 눈과 귀를 막고 싶지 않다. 입에 넣긴 쓰더라도 치료제는 분명 내 곁에 존재한다. 고개를 들고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 일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마주하는 걸 피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반복되는 진통제가 지겨워지는 것은 분명하다.
평생 ‘공감 바라기’로 살아왔는데, 한 순간 공감을 끊는 게 가능할까 싶다. 그치만 싸구려 위로에 눈과 귀를 가리고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이제는 지친다. 깜깜한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마음이 외롭고 막연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움직여야지. 공허한 외침 대신 물장구를 친다. 헤엄을 쳐보기로 한다. 나는 싸구려 위안에서 벗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