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도화지에 펜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펜대를 굴려봐도
섣불리 점하나, 선하나 긋지 못하는 건
용기가 없어서 인지도 몰라
하릴없이 생각에 잠겨 무얼 그릴까 하다
물 한 모금 꿀꺽하고 다시 펜을 잡아
의미 없는 고민은 그만 고만 접어두자고 하니
도화지 위를 닿지 못하고 슥슥 거린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어둠이 내려앉은 우리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건지
애꿎은 매미들의 지저귐만 거슬리는데
어젯밤의 데자뷔인지 헷갈린다
시간은 공간을 초월하지도 못하면서
너와 있던 공간을 도화지에 펜촉으로 그린다
도망치듯 익숙한 장면을 그려내면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