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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Silver)은 원래 하얗다

재료 본연의 색

by 손스침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우유를 처음 보았을 때 마치 머리를 한 대 땅 맞은 것 같았습니다. 노란 빛깔의 바나나맛 우유에 아무런 의구심을 품지 않았던 날들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사물이나 사람을 겉모습으로 쉽게 판단했지만, 알고 보니 뜻밖의 모습을 발견해서 놀란 적 있으신가요? 저는 수없이 많은데요, 최근에는 은(Silver)을 다루며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흔히 실버라고 하면 회색빛이 감돌고 광택감이 있는 은반지의 색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은 본연의 색은 정말이지 뽀얀 흰색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A4용지와 같은 차가운 흰색이 아닌 쌀뜨물처럼 다정하고 진주처럼 은은한 빛깔의 은을 소개하고 싶어요.


그 빛깔이 너무나도 고운 까닭에, 은을 사랑하고 은으로만 작업하는 공예가들도 꽤 많은데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니 이 글은 '은(Silver) 예찬'과 다름없습니다. 몰랐던 은의 매력이 궁금하신 분들은 재미로 가볍게 읽어주세요.


저는 그동안 황동, 백동, 구리, 스텐 등의 물성을 다양하게 다루었지만 은을 다루기 시작한 이후로는 다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물론! 다른 금속들도 저마다의 특성과 매력이 있는데요. 다음 기회에 각 금속의 매력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 정말 많은 재료들이지만, 사실 제작자가 아닌 이상 크게 관심 갖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만 물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해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랬듯이 혹시 어떤 이는 흥미로워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나누고 싶어요.



1.

은의 매력은 고유의 뽀얀 색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금보다 은을 좋아하는데요. 화폐 가치를 떠나서 미학적으로, 물성의 본질로만 본다면 은이 절대 금보다 가치가 낮지 않습니다. 만약 누가 제 멱살을 잡고 "금도끼 줄까 은도끼 줄까"묻는다면, 주저 없이 은도끼를 고를 것입니다.


혹시 순금 핸드폰 고리를 가지고 계신 분 계신가요? 저는 어릴 때 어머니가 가진 걸 보았는데요. 이런 금제품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그 과정은 아마 상상해 본 적 없으실 것 같아요.


금은 워낙 값어치가 비싸다 보니 제작하는 중간중간 중량을 재며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가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미세한 금가루까지 유실 없이 모두 모아야 합니다. 게다가, 카펫이나 쓰레기동에 혹시 들어갔을지 모를 금을 추출(?)해주는 업체도 있습니다. 금가루가 묻었을지 모르는 물건들을 통째로 업체에 보내면, 모두 불태운 다음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순금을 찾아줍니다. 그러면 놀랍도록 큼직한 금괴가 나온답니다.


이렇게 미세한 가루 한 톨 버릴 수 없는 금은, 말 그대로 귀금속 중의 귀금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도끼를 얻으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직접 사용하기보다는 집 안 은밀한 곳에 소중하게 모셔두거나, 당장 금은방에 갖다 줘서 현금화하고 싶어 마음이 복잡해질 것입니다. 재산은 조금 더 늘어나겠지만 그게 지속적인 행복감으로 이어지진 않을 듯해요.


반면 은이 가진 친숙함과 친근함은 참 편안합니다. 아마 은도끼는 마르고 닳도록 잘 사용할 거예요. 그러다 보면 함께한 시간에 더 애정이 깃들고 다시 광택을 내고 다듬으며 오래 곁에 두겠죠. 은도끼의 화사한 빛깔이 제 삶에 산뜻함을 더해줄 것 같아요. (그런데 잠깐. 은이 금보다는 훨~씬 경제적이긴 합니다만, 황동, 백동, 구리 등에 비하면 훨~씬 비쌉니다. 그래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은도끼도 어쩌면 금은방 행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2.

은은 모든 금속 중 가장 높은 반사율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서 빛을 가장 잘 반사하는 금속입니다. 그래서 은에 광택을 내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반짝반짝합니다. 광택을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 밤하늘에 크고 작은 별들이 다른 세기로 빛나는 것처럼 그 모습이 달라지기도 해요.


수십억 년 전, 별의 내부에서 생성된 은은 초신성의 폭발을 통해 지구에 도달했습니다. 지구가 형성될 때 함께 묻혀, 지각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온 물질로 인간보다도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죠. 즉 은은 우주의 잔여물이자 지구의 원초적 물질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그 빛이 더욱 고유하게 느껴집니다.


쉽게 소모되고, 버려지고, 대체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탄생하기 이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물질들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집니다.



3.

은은 상온에 오래 노출되면 공기 중의 황과 반응하며 표면이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이건 본연의 빛깔에 비하면 다소 꼬질꼬질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은이 이렇게 공기와 반응해서 자신의 색을 변화시키는 게 참 재밌습니다. 그저 흘러가버릴 시간을 꼬옥 붙들어 에이징 과정을 거치는 거죠. 계절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집도 세월을 담아 변하는데, 은이라고 왜 변화지 않을까요. 이 불완전함에 더 정이가나 봅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제작자가 되기 전에는 은 주얼리는 너무 빠르게 색이 변해서 일종의 소모품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처음 빛깔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려서 섭섭했어요. 그때는 자주 입는 옷이나, 물건, 그리고 자신조차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모르고 어설펐던 시절이라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든 건 식물에 돌보듯 관심을 기울이고 적절히 관리해 줄수록 빛나나 봅니다.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은은 관리해 주면 말 그대로 다시 빛납니다. 우리에게 새겨진 세월의 주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은은 변색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은 광택천으로 닦아주면 본래의 빛을 금세 되찾습니다. 겉의 색이 조금 변했다고 금속 자체의 본질은 변질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본질은 수천 년이 지나도 유지될 것입니다. 은이 다시금 밝아지는 모습을 볼 때면, 그게 또 그렇게 짜릿합니다.


그리고 은은 자주 착용하면 변색이 느려집니다. 정말 식물과 닮아있지 않나요? 꾸준히 관심을 주고 가까이할수록 더욱 빛나는 속성이 어쩐지 사랑과도 닮아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의 곁을 지켜줄, 라이프타임 프렌드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4.

세상에는 정말이지 수많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원재료 상태로 돌아가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금속은 녹이면 액체처럼 흐르고, 다시 굳으며, 그 자체의 가치를 잃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귀하다.’ 이런 점이 금속에 빠져들게 합니다.


다른 재료들은 어떨까요? 플라스틱이나 아크릴과 같은 재료는 현대적이고 가공성도 좋지만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나무는 다정하고 자연친화적인 재료로 대표됩니다. 저도 그 대체불가능한 안온함에 나무를 참 좋아하는데요. 하지만 목재는 가공하고 분쇄하면 톱밥이 되어 원목의 결을 잃어버리고는 mdf나 합판이 되어버립니다.


반면 금속은 녹이거나 굳히거나 어떤 형태이거나 똑같은 금속입니다. 은의 원소기호는 Ag인데요, 은이 어떤 형태로 되어있어도 Ag가 아닐 순 없습니다. 언제든 어떤 모습으로든 가치를 유지한 채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뽀얗고, 친근하고, 영원한 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은은 귀금속이기 때문에, 다른 재료들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기보단 조금 더 신경 써서 작업을 하는 요즘입니다. 물론 만약 작업을 망치면 녹여서 팔고 다시 만들면 되지만, 그만큼의 시간이 더 소요되는 까닭에 신중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완성도 높은 작업물이 나오기도 해요. 한 달 후쯤에는 더욱 완성도를 높여 펀딩을 올려보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대체되는 세상에서,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존재할 금속, 이 영원함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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