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연속면 Oct 22. 2021

衣. 프리 사이즈와 프로크루스테스

F 대신 S 택을 붙여야 하는 프리 사이즈

나의 BMI(신체질량지수)는 약 21로 의학적으로 ‘정상’이다. 병적인 다이어트 암흑기를 제외하면 이 수치는 줄곧 의학적 정상 스펙트럼 내에 있었다. 그런데도 옷을 사러 가면 언제나 내겐 너무 타이트한 ‘프리 사이즈’가 있었다. 입어봤는데 역시나 불편해서 슬그머니 옷을 내려놓는 내게 점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손님, 살 조금만 빼서 입으심 예쁠 텐데. 딱 3킬로그램만요.” 


옷을 사러 가서 네 번에 한 번—미묘한 확률로, 그러니까 정말로 내 체중이 문제였다기보다는 프리 사이즈 주제에 그 옷들이 작았던 것이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대개는 기가 꺾인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나는 반골 기질이 있고 그 어떤 상식도 의심하는 사람이라 점원 말에 즉시 반박을 했다. “옷이 작게 나왔는데 왜 저더러 살을 빼라 그러세요?” 어떤 가게에서는 거의 싸움 비슷하게까지 치달았다. 내 반박에 점원이 “요새 프리 사이즈는 다 이래요.”라고, 단지 내 반박에 반박하기 위해 사실과 어긋나는 말을 하는 바람에 욱해서 “그쪽도 고등학교 때 조금만 더 공부했으면 지금 여기서 나 같은 사람한테 옷을 팔 일도 없이 좋았을 텐데.”라고 받아친 것이다. 내 말은 틀렸고 비열했고 악의적이었다. 하지만 맞지도 않는 옷을 사게 하려고 남한테 주제넘은 말을 한 쪽이 먼저 잘못했으니 나는 지금까지도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지금은 배기 팬츠나 오버사이즈 핏이 유행이라 그런지, 입으면 소화도 잘 안 될 것 같은 옷에서 내 관심이 떠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점원들이 10여 년 전보다 접객 교육을 더 잘 받았든지 어딜 가도 살을 빼라 어깻죽지를 도려내라 사놓고 한 번도 못 입을 옷을 카드 할부로 사서 묵혀놨다가 5년 후에 결국 버려라 같은 말을 듣진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F’ 택이 붙은 옷이 여러 사람의 체형을 두루두루 커버한다기보다는 획일적인 기준에 몸을 맞추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한국 여성 의류 시장은 타깃 고객이 고작 670만 명(2021년 1월 기준 전국 2-30대 여성 인구 수)에 불과하니 글로벌 대기업이 아닌 이상 다양한 사이즈를 내 봤자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란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러면 그 타깃의 10.4%밖에 안 되는 저체중 인구에게만 맞을 옷에는 ‘F’ 대신 ‘S’ 택을 붙이면 될 게 아닌가? (10.4%라는 건 내 뇌피셜이 아니라 KOSIS에서 2-30대 여성의 연령별 체질량 분포 현황 자료를 보고 계산해 온 거다. 단 체질량 데이터는 해당 연령대 여성 670만 명 중 192만 명의 것만 있다.) 


S라고 해도 브랜드마다, 생산자마다 크기는 천차만별이고 어떤 택을 붙이든 옷의 실측 사이즈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 F나 S나 그게 그거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 이 옷은 스몰 사이즈만 나오나 보군’과 ‘나한테는 프리 사이즈도 작단 말이야?’ 사이에는 틀림없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피어 평가나 트렌드에 민감한 10대, 20대에게는 더 크게 작용한다. 거기다 누군가 다이어트를 해서 입으라느니 프리 사이즈는 다 이렇게 나온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얹으면 기분도 나쁘다. ‘외모 불안이나 부정적 신체 이미지가 자아 인식에 미치는 유해성’ 같은 사회과학적 주제까지 갈 필요도 없다. 또 어쨌든 나도 한때 그 유해성의 피해자였다. 타고난 성격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덕분에 “작게 나온 프리 사이즈는 살 빼서 입으면 되지”라는 말의 폭력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긴 했으되, 나의 병은 알고도 그 폭력성에 기꺼이 몸을 내맡겼다는 점에서 깊었다.  


이 주제에 관해서야말로 나는 책 한 권을 능히 쓸 수가 있다. 다만 원래 하려던 것은 옷 이야기였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BMI는 비슷한데 의류 사이즈 간 경계는 글로벌 이커머스 시장의 국경만큼이나 희미해져서 몸에 맞는 옷을 고르기가 한결 어려워졌다. 심지어 빈티지 숍의 옷들은 대개 택이 없거나 훼손됐거나 해서 믿을 것은 실측 사이즈뿐인데, 나는 여기에 자주 입는 옷의 치수를 부위별 항목별로 외우고 다니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최근엔 줄자를 하나 더 사서 아예 옷가게에 들고 가기도 한다. 

이전 09화 衣. 완성형 멋쟁이의 미니멀리즘 판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