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894 갑오년 3 장 검은 묵주의 비밀
태리는 김개남을 향해 살짝 이마를 숙여 소리 없이 인사했다. 일어선 개남도 허리를 숙여 맞절을 했다. 마주 앉아 태리와 눈이 마주치자 개남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꼬리는 버들개지처럼 휘었다.
“우리 아우가 누이를 퍽이나 그리워하며 살았소. 갑자기 오라버니가 나타났으니 크게 놀랐겠지만 하늘이 무심치 않아 이런 날이 오지 않았겠소.”
그리고는 인두를 향해서도 활짝 웃었다.
“잔치는 따로 하고 우선은 서로 할 말이 많을 테니 나는 그만 일어나겠네.”
그렇게 말해놓고도 개남은 여전히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찾기라도 한 듯 태리를 보며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우리 인두 대장은 말이오. 내 목숨의 은인이오. 인두 대장 아니었으면 피아골에서 호랭이 밥이 될뻔했지. 입이 이따만한 호랭이가 달려드는데.... 그때 우리 인두 대장이 뒤통수에 수리검을 날려 꽂은 바람에 집채만 한 호랭이가 그 자리에서 풀썩 떨어져서는....”
신이 나는지 팔까지 내두르며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다가 개남은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도 지리산 피아골에는 뒤통수에 수리검이 박힌 호랭이가 인두 두령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소이다. 인두 대장이 가면 납작하게 엎드려 등에 태우고 천왕봉까지 내달린다오.”
참말인지 거짓부렁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태리가 인두를 보았다. 인두는 빙긋이 웃을 뿐 말이 없고 개남은 제 흥에 겨워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태리는 개남을 살펴보았다.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다. 웃는 눈이 슬쩍 장난꾸러기 같기도 했다. 남원성 노비들과 백정 무당 역졸과 지리산 땔나무꾼 화전민 산포수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따른다는 사람이 김개남이었다. 왜놈들이 다시 쳐들어와도 동학군들이 물리칠 거라고 말했다. 동학도들은 왜놈을 다시 조선을 쳐들어와 빼앗으려는 철천지 웬수로 여긴다 했다. 동학의 도를 받은 최복술이 동학 도인들에게 도력을 전수해 왜놈들은 도인들 앞에 서면 총구멍이 막혀 총알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칼춤을 추는 동학도들의 도력에 꼼짝도 못 해 지게 작대기로 쳐도 픽 쓰러진다고 말했다. 동학도들은 개 같은 왜적 놈이라 하며 일본 상인들의 쌀 매매를 금지시키고 부잣집 곳간을 열어 장터에 싼값으로 쌀자루를 풀었다. 그래서 일본 쌀장수들은 동학군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부자들은 동학군을 이를 갈며 저주한다 했다. 못된 양반을 잡아다 주리를 틀어 백성들의 쌓인 한을 풀어주는 사람, 맘대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제멋대로 백성의 고리채 빚을 탕감해주는 사람, 그래서 양반들은 모두 남원을 버리고 나주로 운봉으로 한양으로 피난을 갔다. 동학도를 잡아다 매를 치고 죽이고 재산을 다 빼앗은 탐관오리들은 동학군이 온다는 말에 관아를 버리고 죄다 도망쳤다. 동학 도소에 집강소를 세워 동학 두령이 고을 사또처럼 관아의 일을 대신했다. 이전의 귀 한자들이 바닥에 꿇어 엎드리고 이전의 천한 자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쳤다.
태리가 들은 개남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껄껄거리는 얼굴은 임금에 맞서 난을 일으키고 황톳재에서 관군 수백 명을 몰살시키고 양반의 불알을 까버리는 무시무시한 동학 수괴라기보다는 여인들의 애간장 꽤나 녹였을게 분명한 기개 넘치는 호걸풍 사내였다.
태리는 어머니를 구해달라고 사정을 해볼까 아니 김개남도 내가 인두의 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은혜를 베풀어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머릿속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돈이 급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을 하는 어머니 운봉 댁은 비싼 이자를 거두고 돈을 갚지 못한 사람들의 가산을 빼앗았다는 죄로 대도 소에 붙잡혀 온 것이다. 개남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골똘히 생각하는 태리를 귀여운 듯이 바라보던 개남이 인두를 보더니 귓속말처럼 하는 말은 태리 귀에도 박혔다.
“줄동이 생각이 나는구나.”
그 말에 화락 인두가 얼굴을 붉혔다.
줄동이?
태리가 쳐다보았을 때 개남은 일어나 성큼 문밖으로 나갔다.
“어디에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인두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한잠도 못 이룬 게냐?”
인두는 안타까운 눈으로 태리를 보았지만 태리는 이 사내가 오라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입술을 달싹이지 않았다. 가뭄 때문인지 들창문 밖 배롱나무 꽃 사이에서 아침부터 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태리는 옷소매에서 작은 십자가가 매달린 검은 묵주를 꺼내 탁자에 올리고 가져가라는 인두 앞으로 밀었다.
“갖고 있거라. 어머니의 묵주다.”
“어머니? 그러니까 내 어머니가 천주학쟁이였단 말?”
“그래. 천주님이 주신 이름은 세실리아라고.”
인두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우리 어머니는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를 믿는 죄로 부모님이 처형당해 어릴 적부터 회문산 깊은 골짜기에서 숨어 사셨다. 열두어 살 때 교우촌 사람들과 너듸장터 구경을 나왔다가 왈패들에게 붙잡혀 남원 둔덕방 최씨집안에 웃방데기로 팔려가셨고.”
“웃방데기?”
“풍으로 반신 불구된 노인을 밤낮으로 모시는 어린 소녀....”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은 어디에?”
태리는 인두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인두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늘나라...”
태리는 절대 사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를 가져 입덧이 심해 수정과만 드셨다하지 않는가. 외할아버지는 늘 내가 어머니를 닮아 주판을 잘 굴린다 했다.
“너를 낳고 돌아가셨다. 네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운봉아짐이 나는 노비로 팔고 너는 딸로 삼았다.”
태리는 재미있는 남의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아버지는 누구요?”
인두는 대답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태리가 코웃음을 쳤다.
“천주학에서는 애비없이 태어난 예수를 상제로 믿는다더니... 그래서 천주학쟁이들은 바람난 처녀가 애를 낳아도 아무렇지 않나 봅니다. ”
인두의 얼굴이 벌게졌다.
“어머니를 욕보이는 말을 하다니. 누구보다도 너를 훔쳐간 운봉아짐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제 운봉 댁이 너를 데리고 밤 도망을 친-”
“네놈이 무엇을 바라고 내게 그런 흰소리를 하는지 내 알바 아니나,”
인두의 말을 칼로 내리치듯 토막 친 태리는 깊은숨을 쉬고 배에 힘을 주었다.
“내 어머니는 네놈들 동학비도들을 피하고자 했을 뿐이다. 황건적처럼 미쳐 날뛰고 양반을 욕보이는 불학무식 모리배들이 판치는 이런 세상에 사람이라면 어찌 살 수가 있겠느냐. 수건을 걸어놓고 납폐? 이런 식의 혼인은 짐승도 하지 않는 일.”
태리는 인두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수염 아래 입술에 지네가 지나가듯 흉터가 선명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인두는 차츰 안타까운 눈빛으로 태리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짐승도 하지 않는 일, 짐승만도 못한 일을 둔덕방 최 씨 대감댁에서 우리 어머니께 저질렀다. 사냥당하듯 왈패들에게 잡혀온 소녀인 줄 알면서도 돈으로 사서 늙은 제 아비의 이불속으로 밀어 넣었다. 천주학쟁이라는 이유로 나라에 발고하겠다 겁박하고 집안의 사내들은 우리 어머니를 욕보였다. 제 집안 핏줄이 분명하건만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제삿날 부침개 하나 집어먹었다고 며느리가 인두로 입을 지졌다. 그뿐이냐. 갓 태어난 딸을 훔치고 어미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 여섯 살에 어미를 잃고 우는 나를 흥양으로 보내 지옥 같은 말 목장에 노비로 팔아넘겼다. 그게 공맹을 외우고 인간의 도리를 밤낮으로 논하는 자들이 밥먹듯이 저지르는-”
“그럴 리가 없다. 이 놈 어디서 감히 우리 가문을-”
“어미를 죽이고 오래비를 팔아넘긴 원수의 품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싶은 거지? 비단옷 쌀밥 속에. 빈대 들끓는 옥에서 하룻밤을 지내보니 그렇게는 죽어도 살지 못하겠지?”
그때였다.
“형님, 형님.”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 뛰어들어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태리가 보니 동몽군인지 상투머리가 아니었다.
“왜놈들이 궁궐을 점령해 임금을 포로로 삼고 조선 군대를 죄다 해산시켰습니다. 모든 무기를 다 빼앗답니다.”
숨넘어가는 소리에 인두가 튀어 오르듯 일어섰다.
“무어라? 봉득아 다시 말해보거라. 나라가 왜놈 손에 넘어갔단 말이냐?”
“예. 예. 풍도 앞바다에도 왜놈들 배가 나타났습니다. 청나라 군함을 대포로 때려 박아 박살이 나고 천명이 넘는 청나라군이 그 자리에서 물고기 밥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청군까지 일본군에 패했다고?”
“난리난리입니다. 한양 사람들이 난을 피해 다들 성 밖으로 도망하느라 수백 명이 밟혀 죽었다고도 합니다. 왜놈들 대포 한방에 청나라 군함이 박살이 났으니 청나라군도 믿을 수 없다고 나라안이 아수라장이라 합니다. 개남장께서 접주들은 당장 장청으로 들라고.”
“가자.”
금세 뛰쳐나가려던 인두가 멈칫 태리를 보았다. 그리고 탁자 위의 검은 묵주를 집어 소맷자락에 넣었다. 태리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봉득은 노랑 저고리 태리 얼굴을 보았다.
“가자.”
인두는 멍하니 태리를 보고 있는 봉득의 등을 쳤다.
“잠깐만. 그게, 오, 오라버니..... 왜놈들이 남원성에도... 나는 나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코를 움켜쥔 태리의 두 눈은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두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왜놈들이 와서.. 다 죽이고.... 내 코도 베어 가면.... 코 없는 귀신이 밤마다....”
횡설수설 코 없는 귀신 이야기를 하며 다가오던 태리는 인두를 붙잡으려는 듯 팔을 내밀며 휘청했다. 봉득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태리를 붙잡았다. 맨드라미 노랑 저고리에 살구꽃 연분홍 치마가 봉득의 품에 털썩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