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1894 갑오년 4장 왜군 경복궁을 함락하다
“풍도에서 청나라 군함이 왜놈들이 대포 한방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수천 청나라군이 산채로 물고기 밥이 되었다 하니 이제 조선은 끝장이 났소.”
“저놈들이 다시 남원성에 와서 코를 벨 것이라고 사방에서 무서워하며 미쳐가고 있소이다. ”
한양의 소식이 이미 남원성 안에도 퍼졌는지 장청 앞이 소란스러웠다.
인두는 봉득과 함께 장청으로 들어갔다.
사흘 전 남원 장날 총을 든 정예병 3천을 이끌고 흰 백마 갈기를 나부끼며 김개남이 남원성에 입성할 때 좌우에 말을 타고 입성했던 담양 접주 남응삼과 흥양 접주 유복만의 얼굴이 보였다. 남응삼 접주는 대도소의 살림과 사무를 맡고 있으며 유복만 접주는 교룡산성을 수리하며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다. 동몽들은 남접주를 이조판서 유접주를 병조판서라고 부르며 즐거워했지만 당장 두 접주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인두는 허리를 숙여 짧게 절하고 개남 옆에 앉았다. 봉득이 그 뒤에 따라 앉았다.
“백성들이 피난을 가야 한다고 부뚜막에서 솥단지를 떼고 있소이다.”
“부안이고 영광이고 바닷가 동네에선 전쟁이 났다고 사방에서 관아에 뛰어들어 무기고의 무기를 꺼내 들고 무리 지어 부잣집에 불을 지르고 창고를 털고 있다 하지 않소.”
“왜놈들이 한양을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아 물에 다 처박고 임금이 군대를 해산시켰으니 백성들이 제정신이겠소.”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골똘하게 생각 중인 풍채 좋은 노인은 개남의 집안 어른 김상흠이다. 하얀 수염이 관운장 같은 상흠은 전주 감영 군인으로 40년을 한양을 오르내리며 번을 선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대원군 시절에는 호랑이 포수들과 함께 강화도에서 번을 섰으며 태인에서 한양까지 삼남길은 거미줄처럼 환했다. 40년을 번을 섰으니 한양 궁궐과 북촌 어느 대감집 감나무가 몇 그루인지 마포 객주들 첩 이름까지도 알았다. 인두도 개남과 함께 상흠을 따라 한양에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이었다. 정량리 둥구나무 같은 개남도 백중날 씨름판에서는 칠십이 넘은 노익장 김상흠에게 번번이 나가떨어지곤 했다.
“임진왜란 때부터 왜놈들 대가리 속은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삼키려는 것, 오로지 그 하나지요.”
까만 수염이 무성한 텁석부리 흥양 접주 유복만이 분한 목소리에 김상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상이네.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서양 열강처럼 청나라 땅을 할양받으려는 거네. 오래전부터 산둥반도를 탐내 오고 있지.”
“청나라가 그리 호락호락 일본에 당하겠습니까?”
“당했지 않은가. 풍도에서 왜놈의 대포에 군함이 가라앉고 천명이 수몰되었다는 소식은 사실일 걸세.”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습니까. 이제 어찌하면 좋습니까?”
심성이 따뜻해서 따르는 도인들이 많은 담양 접주 남응삼이 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양에서 소식이 왔습니까?”
“아니네. 풍도에서 대포가 터지고 전쟁이 나자 배를 타고 소문들만 무성할 뿐. 폭폭허고 답답하구만.”
우렁우렁 한 유복만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개남이 인두를 향해 말했다.
“인두, 자네가 한양에 바삐 다녀와야겠네.”
“예.”
인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접주들이 객사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우선 객사로 가서 의논을 해보세.”
동몽들이 객사 댓돌 위의 신발을 가지런히 하고 마당에 연신 물을 뿌려댔다. 칠월 칠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하늘엔 구름이 없었다. 보리 벨 때부터 시작된 가뭄은 모심을 논을 바짝바짝 갈라지게 해 애를 태우더니 객사 앞 베롱꽃을 날름날름 연기 없는 불꽃처럼 피워 올렸다. 지리산 천왕봉에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가을에 곡식을 제대로 거둘 수 있을지 다들 걱정이 많았다.
“어서 오시오.”
다들 일어나 인사를 하고 넓은 객사 마룻바닥에 빙 둘러앉았다.
남원 객사 용성관에는 호남 좌도 접주들 뿐 아니라 남원성을 함락하고 대도소를 연 김개남 대접주를 찾아온 경상도 충청도 접주들 얼굴도 보였다. 고을 수령의 작폐와 백성들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집강소 설치를 의논하려던 이들이었다. 공주 취회 삼례 취회, 한양 경복궁 상소 등 여러 차례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동학의 대접주들과 수접주들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가리지 않고 서로 낯이 익었다. 무엇보다도 지난봄 보은에서 수만이 모인 자리에서 포의 두령으로 임명받은 대접주들은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양척왜 포덕 천하의 대의 앞에 생사를 함께 하기로 결의하지 않았던가.
“임진왜란 때도 정유재란 때도 궁궐은 다 불타도 임금은 포로로 잡히지 않았소이다. 민씨 도둑놈들이 백성의 뒤주와 나라의 곳간을 거덜내고 군대를 아작내고 마침내는 청군을 불러들여 왜놈들이 따라 들게 하고 나라를 아예 송두리째 불구덩에 던져 넣었소이다. 전쟁을 피하고자 전주성을 비워주고 나왔건만 경복궁이 함락되다니...”
인두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양 궁궐에 있는 줄동이는 어찌 되었을까? 왜놈들 총에 맞았을지도 모른다. 정량리 대보름날 밤 줄다리기하는 줄동이의 허리를 품어 안고 줄을 당기던 날 입술에 스치던 그 뜨거운 귓불 하며 해월 선생이 지금실에 머무르던 여름날 냇가에서 원추리 꽃송이에 넣어 옥가락지를 건네던 날 줄동이의 물 묻은 손가락과 배시시 웃던 얼굴이 방바닥에 그린 듯이 떠올랐다. 때가 되면 꼭 혼인을 하리라 마음먹은 처녀였다. 민 왕비의 집안 금송아지 대감 민영준에게 몰래 줄동이를 바친 균전어사 김창석 그놈을 생각하면 상두산 아래 그 집을 불태워버렸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지난해 한양 광화문 복합 상소 때 인두는 개남과 함께 한양에 갔다. 무장 대접주 손화중을 비롯한 보은 대도 소에서 대표로 뽑힌 각도 40명의 동학 접주들이 천명을 받아 무극대도를 펼친 교조 최제우가 죄 없음을 인정하고 동학을 공인하여 탄압을 중지해달라는 상소를 붉은 함에 담아 사흘간 광화문 앞에 엎드려 있을 때 한편으로 개남을 비롯한 접주들은 글을 써서 왜국과 서양 각국의 영사관에 붙였다.
동학을 수학하는 우리가 이로움만 따지는 너희와 함께 앉아 말을 하겠는가, 한 달 후까지 떠나지 않으면 우리 의로운 병사들이 너희를 토벌할 것이다, 후회하지 말고 급히 네 나라 땅으로 돌아가라는 벽서였다.
깊은 밤, 벽서를 몰래 붙이다 영국 영사관 앞에서 줄동이를 마주친 것이 마지막이었다. 너무나 달라진 줄동이 모습은 궁궐의 공주 같았다.
“인두? 지금실 인두?”
쓰개치마를 쓴 처녀가 물었다. 입술 때문에 한눈에 알아봤을 터였다. 초롱등을 든 손가락에 보이던 애처로운 푸른 옥가락지가 아니었다면 태인 산외면 오공리 김 부잣집 노비였다고 믿기 힘들 얼굴이었다. 그러나 개가 짖고 영사관에 불이 켜지면서 바삐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영사관에서 나온 사람에게 무어라 말하는 줄동이 소리를 뒤로 하며 골목을 달렸다. 그러나 한양을 떠나올 때까지 틈만 나면 궁궐 주위를 맴돌았지만 그 얼굴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다시 한양에 가면 줄동이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경복궁 점령 소식에 전주성에 주둔 중이던 강화병이 한양으로 모조리 떠났소. 전주성은 무주공산. 왜놈이 들이치기라도 하면 문 닫을 수문장도 도망을 갈 것이오.”
객사 안은 여전히 접주들의 논의가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 계속되고 있었다. 남원 대접주 김홍기의 목소리가 커졌다. 만석꾼 임실 대접주 최봉성의 맏사위이자 오수 둔덕방 순천 김 씨 가문으로 휘하에 포덕한 교인이 수만명인 김홍기가 지난해 김개남에게 남원성에 대도소를 정하라 강력하게 요청한 까닭도 일본이 머지않아 침략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임진년에는 육군과 수군 군대가 의병들과 손잡고 나라를 지켰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이 나라엔 세금을 실어 나를 배는 서양배로 들여와 수천 석을 싣고 한양으로 오가지만 군대를 태울 군함 한 척이 없고 바다에서 싸울 이순신 같은 장수 한 명이 없소이다. 삼도수군총제사 민형식 그자가 통영에서 한일은 삼남의 부호 재산을 빼앗아 가는 일밖에 더 있었소이까.”
김홍기의 말에 남원 천민 접을 이끄는 김원석이 입을 열었다. 남원성 관노비였던 김원석은 노비들 무부들 수천의 우두머리 접주다.
“백성들을 지켜줄 것은 동학군밖에 없어라우. 우리 동학군이 왜놈들과 싸워야지라. 개 같은 왜적 놈들이 남원성에 오면 우리 모다 죽을 일밖에 남지 않았응게요. 세 살 먹은 애들도 호랭이 왔다는 말보다 코 비어 가는 왜놈들 왔다는 말에 울음을 그치는 곳이 전라도지라. 그중에서도 남원성은 1만의 백성이 다 죽고 코가 비어져갔으니. 살아있는 건 개 한 마리도 남지않은 남원성이었응게요. 싸워야지라. 눈뜨고 코베일 순 없지 않것어라루.”
강접이라고 소문난 교룡산성 아래 화산당 접주 이춘종 접주의 말이 이어졌다.
“보국안민. 개 같은 왜적 놈을 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수운 선생이 용담유사에 몇 번이나 했던 말이 이런 앞날을 내다본 말이지라.”
“옳소.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쌀만이 아니라 기름진 토지와 강물과 산과 자식까지 다 왜놈들 헌티 빼앗기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참새가 죽어도 짹 하고 죽는디 앉아서 다 내놓을 순 없어라우. 우리가 싸우다 지면 또 자식들이 어른되면 나서 싸우겠지라. 끈질기게 싸워야지라.”
접주들의 말들이 방을 울렸다. 인두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운봉댁 여종이 데려가던 싸개밖으로 보이던 그 작은 발바닥만 평생 뇌리에 박혀있었던 여동생을 이제 겨우 만나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렇게 전쟁이 났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선화당을 쩌렁쩌렁 울리는 접주들의 소리 중에도 인두는 쓰러진 누이동생 생각에 방바닥을 문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