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1894 갑오년 8장 남원에 온 총대장 전봉준
전라감사의 군사마를 태운 말은 금세 성문 안으로 사라졌다. 군사마가 남원성으로 달려온 이유가 뭘까? 벌렁거리는 가슴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하며 박봉양은 요천수 물가로 내려섰다. 더위를 피하느라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았다. 불볕 가뭄이 오래되었으나 지리산 천 개의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남원 부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수는 드넓고 흰 모래사장 사이로 변함없이 푸르게 흐른다. 마르지 않는 요천수 덕분에 남원 옥야 백리 들판 나락은 가뭄에도 푸르게 남실거렸다. 버드나무 아래로 들어 박봉양은 나귀 등에 앉은 딸을 내려 그늘에 앉혔다. 쓰개치마를 내린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다. 박봉양은 한숨을 쉬며 나무 그늘에 앉았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맑은 물속에서 멱을 감는 어린애들이 낭랑하게 맞춰 부르는 소리는 동학 주문이다. 모래밭에서 막대기를 휘두르며 펄쩍펄쩍 칼춤을 흉내 내는 아이들도 노랫소리.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수운이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지어 불렀다는 칼노래는 김개남이 남원성에 든 날부터 들리지 않은 곳이 없더니 이제는 어린애들까지 따라 부르지 않는 이가 없게 되었다. 모래에 손을 파묻고 두꺼비집을 지으며 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지난봄 고부에서 비롯되었다는 노래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년 을미년
병신 되면 못 가리.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며 왁자하게 한 목소리로 터트리는 소리는 정감록이다.
‘이씨조선 오백 년 날이 저물고
계명 천지 닭소리 새나라가 열리네.
물먹는 나귀의 고삐를 잡은 채 떠꺼머리 종은 입을 헤 벌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야 이놈아 나귀 제대로 안 잡고 어디 곁눈질이여. 세상이 뒤집힌 것 같지. 천만에. 세상이 그리 쉽게 뒤집힌다더냐.”
박봉양의 역정에 고개 숙인 종이 입을 비죽였다.
“이 놈아 얼릉 와서 담뱃불 붙여라.”
종은 후다닥 담뱃대를 꺼냈다. 박봉양이 입에 긴 담뱃대를 물자 담배쌈지를 꺼내 써럭초를 꾹꾹 쟁여 담았다. 어서 한 모금 연기를 빨았으면 하는 맘으로 불붙기를 기다리며 박봉양은 수운 최복술이 남원에 와서 처음으로 들렀다는 광한루 근처 서씨 약방을 노려본다.
‘저 서씨 영감탱이는 약방에서 감초나 썰 것이지 뭣하러 최복술이를 교룡산성 절간에 들여보내 칼춤을 추고 노래를 짓게 했단 말인고. 목이 베어 죽은 역도 놈을 따르는 놈들이 이토록 번성해서 왜놈들까지 불러들이지 않았는가. 흥, 정감록에 혹한 놈들이 조선 망한다고 그리 닭소리 계명천지 씨부리더니 꼴좋구나. 이렇게 왜놈들이 주인 될 줄 모르고 계룡산 정씨 진인 노래를 불렀단 말인가. 세상이 말세여서 김개남이 같은 놈이 남원성을 차지하고 날도적질로 재산을 다 분탕질해가니. 원수로다 원수로다. 경주 땅 최복술이 그놈은 글깨나 읽은 선비 놈이 어쩌자고 상제를 만났다고 무당질에 부적을 써서 이 난리를 불러왔는고. 남원에 와서 이 사단을 불러왔는고.’
떠꺼머리 종은 노랫소이에 정신이 팔렸는지 부싯돌만 딱딱거릴 뿐 담배에 불이 붙을 줄 모른다. 역정이 난 박봉양이 담뱃대로 종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이 천하에 돌대가리 같은 놈. 밥만 처먹을 줄 알지 하는 짓거리는 개 돼지만도 못하지. 이런 놈들이 한울님이라고? 소가 웃고 개가 웃을 소리지. 타고난 우둔한 씨를 어찌 바꾼단 말인가.”
그러자 저쪽에 그늘에 앉아 ‘금쟁반의 술은 백성들의 피요 옥쟁반의 고기는 백성들의 살이라 풍악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아라’ 흥얼거리던 젊은 사내들이 다가왔다.
“여보시오. 당신은 뉘신대 사람을 담뱃대로 그리 대갈통 깨지게 친단 말이오?”
박봉양은 엉거주춤 일어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운봉 동학도다. 지금 김개남 대접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오는 길이다.”
“오메 같은 도인이셨구먼. 운봉 왕 박문달 접장 맞제라? 그란디 박접장 말은 반토막 치지 말고 지대로 허셔야지라.”
“남원성을 개남장이 함락하니 만석꾼 재산 지키려 부리나케 동학에 입도했다고 운봉에서 남원까지 소문이 쫙 났든디 반갑구만이라.”
“그란디 박접장. 귀천을 나누지 않는 동학에 들었으면 도인답게 행해야지 어디서 담뱃대로 하늘 같은 사람 뒤통수를 내리친다요?”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것들이 접장접장 하는 소리가 박봉양은 기가 막혔으나 이자들이 떼로 뭉쳐 무슨 행패를 부릴 줄 몰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디 평생 종노릇 했던 나도 인제 갓 한번 써볼거나.”
사천왕같이 우락부락한 덩치에 퉁방울눈을 한 사내가 사마귀처럼 홀쭉한 박봉양의 머리에서 억지로 갓을 잡아당겼다..
“갓 쓰니 자네도 정승 판서 같네 그려.”
“어디 나도 전라감사 노릇 한번 해볼까?”
박봉양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집안 노비조차도 입을 헤 벌리고 구경을 하고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만 붉어졌다 파래졌다 할 뿐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으로 제기 차듯 오가든 갓은 급기야 물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오.”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하얀 갓을 쓴 사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동행하던 사내 여럿도 말을 멈췄다.
“뭣이여? 뭐하는 짓이냐고? 시방 당신 나헌테 허는 소리여?”
퉁방울눈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흰 갓을 쓴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에 떨어진 검은 갓을 주워 물기를 털었다.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짧게 한마디 하고 박봉양에게 갓을 두손으로 돌려주었다.
“아따 이 양반, 지금 갓 썼다고 유세를 떠는거여? 여그가 어딘 줄 알고. 잘 알아둬. 여그는 남원땅이여 남원. 개벽 세상 남원이란 말이여.”
퉁방울눈 옆의 사내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그러자 흰 갓을 쓴 사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사람의 갓을 벗겨 수모를 주고 욕을 보이는 건가? 접장은 어느 접이길래 이렇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오? ”
“머시여? 무례?”
퉁방울눈은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침을 퉤 뱉었다. 그때 황급한 목소리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형님, 저 연구입니다.”
김개남의 조카 김연구였다.
“이분은 동학군 총대장 전봉준 접주십니다. 대접주 명을 받고 총대장을 모시고 오는 길입니다.”
큰 소리가 나자 싸움이 났나 하고 쪼르르 달려와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전봉준 장군이다 녹두장군이다 외쳤다. 깨를 벗고 물속에서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이 고추를 가리고 뛰어왔다.
퉁방울은 김연구를 보자 입을 열지 않았다.
“남원성 함락에 앞장섰던 화산당접 도인들입니다.”
김연구의 말에도 전봉준의 눈은 풀리지 않았다. 퉁방울눈은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보더니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어서 가시지요.”
김연구의 말에 전봉준은 다시 말에 올랐다. 더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박봉양도 서둘러 나귀를 재촉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