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
우리 집엔 생명체가 셋 있었다.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콩이라는 13살 말티즈 .
한주 전부턴 집에 생명체가 하나 늘었다.
나와 나의 아내, 콩이와 연우.
딸이 생겼다.
몇 개월 간 아내의 배속에 있던 그 친구, 초음파로 보면 얼굴을 항상 팔로 가리고 있어 와닿지 않던 그 친구의 존재는, 급한 수술로 투명한 박스에 담겨 수술실에서 나와 초점이 모이지 않는 눈동자로 몇 초간 나를 응시할 때, 그제야 나는 그 존재를 각인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아내를 존경하게 되었다.
설명하기 어렵다. 경외감이다. 나의 아내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 과정(임신->출산->육아)을 담아내는 방식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길을 지날 때 아이를 가진 모든 사람이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 일상을 지탱해 내는 모든 것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은 다들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과정이다.
그런 사회기도 하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을 뭐하러 하냐고, 비난도 참 쉽다.
그런 사회에서 버거운 일상을 지탱해 내는 일반 사람들과,
그 사이로 들어온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받아들였던
평범함과 일상의 위대함을 목격하고,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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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연우 밥을 챙길 일이 생길 때 연우가 젖병을 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온 힘을 다한단 생각이 든다.
38개월을 채 못 채우고 나온 아이,
6-7번 젖병을 빨고 헐떡이다, 다시 젖병을 빠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친구한테 이 젖병이 세상에 닿는 줄이구나.
게워내기도 하고, 속 불편해 트림이 나올 때까지 인상을 쓰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 일을 두 시간에 한 번씩 반복하고.
가만히 보면 지금 내가 느끼는 힘듦이 이 친구가 느끼고 있는 생존을 위한 힘듦보다 과연 대단한 일일까 싶게 된다.
어리광 부리지 말란 말은 내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닐까. 이 친구의 절박함이 좀 더 본질적인 거 아닌가.
연우를 받은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다.
"젖 빠는 건 정말 악착같아야 하고, 그 힘을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젖 먹던 힘이라는 말을 쓰는 거다."
이 친구의 첫 악착같음은 나와 아내가 목격했다.
앞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될 이 친구를 잘 서포트하고 싶다.
이 친구가 살아갈 나의 주변사회를 잘 설계해 나가고 싶다.
적어도 내 삶에선 주연으로 살기 위해 아둥바둥하던 나는,
이제 내 삶에서 조연인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어째선지, 이 친구를 보고 있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진다.
나의 보물, 나의 세상, 나의 미래인 연우.
나와 내 아내의 세상으로 와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