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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Feb 18. 2023

02. 도망갈래

도망도 앞으로 달려가는 거니까

열다섯 살 때 친해진 P는 수식어 뒷면의 나를 들여다보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나를 보면서 그렇게 많이 웃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체육관 가는 길에 매일같이 까먹고 고정문을 당길 때도, 처음 착용해 본 렌즈를 빼느라 두 시간 동안 거울 앞에서 낑낑거릴 때도 P는 하염없이 웃었다. 그 시간들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처음 잠수하는 법을 배운 듯 맑고 상쾌했다. P와 함께 있어야만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다만 사람은 물속에서만 호흡할 수 없기에 결국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따가운 육지로 발을 디뎌야 했다.


어느 날 P가 동아리 회식을 다녀오고 나서 연락을 했다.


오늘 밥 먹는데 네 얘기도 나왔어. 애들이 뭐라고 말하냐면, 너 지나가면 길 비켜줘야 될 거 같다고, 여왕님 같다고. 수업 시간에 조는 걸 한 번도 못 봐서 신기하다고. 딱 네가 싫어하던 네 이미지 그대로야.


길 비켜주는 건 사실 이미 겪어본 적 있어. P는 또다시 깔깔 웃었다. 너 가까이에서 보면 그냥, 그냥 사람인데. 사실 애들이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너 보면 그냥 삐걱거리는 재밌는 로봇 같단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들 너같이 생각하면 좋겠다. P와의 대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고등학교는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가야겠다. 웃는 얼굴 말고 다른 표정을 허락받을 수 있는 곳으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사범대학 부속의 사립 중학교였고, 바로 옆에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가 있었기에 우리 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 간다면 지금과 다름없는 삶을 살 것이 뻔했다. 나를 기억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할 텐데, 사실 자신이 없었다. 중학생 때와 달리 내신뿐만 아니라 모의고사 성적으로도 줄 세워지는 고등학교에서 모든 방면으로 완벽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통학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집에서 먼 고등학교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 중학교에서 매년 한두 명밖에 진학하지 않는 과학 중점 고등학교에 지원할까 했지만, 그곳은 추첨 형식으로 입학생을 받았기 때문에 순전히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르고 골라낸 곳이 자사고, 즉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였다. 대부분 서류 평가와 면접을 통해 입학하기 때문에 이곳은 내 노력으로 진학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많고 많은 자사고 중에서 내가 선택한 곳은 서울 소재의 한 기숙형 고등학교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수학을 가장 좋아하기는 했지만 다른 과목들도 큰 차이 없이 두루 좋아했기에 과학고나 외고보다는 자사고가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사고 중에서도 이곳이 적은 전교생 수 대비 입시 실적이 뛰어나게 좋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그 고등학교의 입시 설명회에 다녀왔고, 다양하게 개설된 대학 과목들과 자유로운 시간표 구성이라는 이점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그곳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설립된 지 40년이 넘은 우리 중학교에서 그 고등학교 진학에 성공한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나의 결심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응원해 주었고, 나 역시 두려움이 없었다. 그토록 싫어했던 과분한 칭찬과 선망의 눈빛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자존감이 길러졌던 덕분이었다.


그 도전은 희망찬 첫걸음보다는 도망에 가까웠다. 하지만 도망도 결국에는 전진하는 거니까, 앞을 향해 나아가는 거니까. 무르고 비겁한 속내를 숨긴 채 당찬 포부를 안고 달려나가는 척했다.


그렇게 면접이 반 년 정도 남은 열여섯 살 여름날에 나는 입시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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