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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an 28. 2022

뭐든 쉬운 게 없어요

영서는 고1초까지 농구를 했다. 훈련 중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운동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부상을 입고 팀이 있는 학교를 떠나 집 근처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내가 영서를 만났을 때는 고 1,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영서는 5개월간 다닌 학원에서 중등과정을 마쳤다고 했지만 중 1에 나오는 정수 연산, 일차방정식을 풀지 못하는 걸 보고 나는 영서가 문제를 풀기보다 설명만 들어왔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런 경우 문제를 통해 소화한 게 아니다 보니 안다고 할 수 없었다.  

   

다른 과목보다 전이성이 큰 수학은 학습결손을 회복하기가 어렵다. 몇 개 단원이나 한 학년 정도는 제 학년 진도를 나가면서 공백을 채워나가면 되지만, 영서처럼 중등과정이 통째로 비어있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중 3 수학은 중고등 과정을 연결하는 허리와 같아서 이것만 잘해도 어느 정도 교과 수학의 체계를 익힐 수 있다. 나는 영서에게 중 3 과정을 나가면서 중1, 2에 나오는 방정식, 함수, 부등식을 계통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시간이 많다면 중 1 수학부터 차근차근 나가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공부해보니까 어때?”

“뭐든 쉬운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년 이맘때는 뭐했어?”

“여수로 전지훈련 갔어요. 해변에서 구보 훈련하고 졸업한 선배들하고 시합하고요.”

“가만히 앉아서 머리 쓰고 있으려니까 운동할 때가 그립기도 하겠다.”

“맞아요. 땀 흘리는 게 좋았거든요.”

“운동할 때 뭐가 힘들었어?”

“욕먹는 거요.”


영서는 코치 선생님한테 듣는 “이 새끼” 정도는 일상이지만,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상처되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네가 운동하는 동안 다른 애들은 공부를 해왔는데 몇 개월 공부하고 따라잡는다면 그거야말로 불공평한 거지, 안 그래? 공부를 하면서 끈기, 자기 조절 능력, 목표에 집중하는 힘을 몸에 쌓는데, 너는 운동으로 그걸 해온 거야.”     


공부가 중요하다면 스스로를 단련한 경험 때문일 거다. 영서가 지난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했다. 영서는 수업을 마칠 때 “수고하셨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나는 처음에 그 모습에 약간 감동을 받아서 “그 말 참 듣기 좋다, 고마워”라고 했다. 영서는 수학 기초는 없을지 모르지만 태도만은 탄탄한 학생이다.     


“검정고시 쳐보면 어때? 대학 입시까지 생각하면 그게 유리할 수 있어.”


2학기 두 번의 시험을 보는 동안 영서는 숙제 외에도 문제와 풀이를 필사하며 분투했지만 시험 난이도까지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도 풀 수 없는 시험을 쳤을 때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내 눈에도 영서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로 남은 정기고사를 보는 동안 끌려다니는 기분일 거야. 대학 입시에서 재학생들과 경쟁하면 불리한 건 당연하고. 검정고시 전형으로 입시 준비를 하는 거야.”     


사실 이런 이야기 나도 부담스럽다. 학생을 책임질 수 없는 과외선생님 입장에서 주제넘을 수 있다. 하지만 영서는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있어서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게 있었다.

   

“운동 때문에 잃은 게 아니라 얻은 게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영서는 공부한 것 이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운동으로 배웠을 거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것만큼 정직하게 배우는 일은 없으니까. 뭘 하든 그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학교 시험을 치르는 동안 들러리가 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게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별일 없었어?”

나는 이런 말로 수업을 시작할 때가 많은데 오늘은 영서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엄마한테 혼났어요. 운동처럼 공부를 죽기 살기로 안 한다고요. 엄마는 내가 공부도 악착같이 할 줄 알았나 봐요.”

“네가 죽기 살기로 운동했을 때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어? ”

“중학교 때는 공부도 놓치기 싫어서 훈련이 끝난 뒤에 새벽까지 공부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운동도 공부도 해볼 만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다 자신 없어요.”


어떤 일을 죽기 살기로 할 때는 나에게 그만한 힘이 있고 할 수 있다고 느낄 때다. 내 능력으로는 해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지만 죽기 살기는 안된다.


초등학교 5학년, 처음 농구공을 잡은 이후로 농구밖에 모르고 살아왔는데 그 시간이 무용지물이 되고 보니 막막하고 억울하기도 하겠지. 나이를 더 먹었을 뿐 경험해보지 않은 일 앞에서 나는 어떤 말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날 나는 '하루치 성취감'만 쌓는다 생각하고 하루만 잘 보내보라고 했는데 그게 영서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들어주기만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 때쯤 영서에게 문자가 왔다.


"선생님, 검정고시랑 수능, 대학에 대해 좀 더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검정고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서요."


나는 검정고시생 대상 EBS 입시설명 유튜브 영상을 영서한테 보내주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했다. 수시와 정시의 차이점부터 학생부 종합전형과 학생부 교과전형, 검정고시 점수를 내신점수로 치환하는 것까지 생소한 용어에 복잡하기는 또 얼마나 복잡한지. 이걸 알아보는 게 공부다. 


내 경험에 의하면 학교를 다니면서 지망 대학과 학과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고3 수시전형이 시작할 때 겨우 알아보는 식이었는데 준비한 걸로 원서를 쓰는 게 아니라 내 조건에 맞춰 적당한 곳을 고르는 형국이었다.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 대학 입시 전형은 들어도 도통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하지만 과거보다 학생이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병 주고 약 주는 기분이 들지만). 예를 들어 '대학 어디가'사이트에 대입전략 자료실을 검색하면 나의 조건에 맞는 학교를 알아볼 수 있고 전화상담도 가능하다.


영서처럼 각자의 사정에 의해 '정상궤도'가 아닌 다른 길 위에 있는 아이들이 있다. 이탈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도 된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혹시 결과가 내 예상을 빗나가더라도 내가 선택했기에 배우는 것이 있고 대학, 취업 이후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등산학교를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다. 물리적인 어려움 앞에서 자기 몸을 건사할 수 있는 사람이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마음먹은 대로 실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육체적으로 극복한 경험은 내 안에 있는 힘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농사를 지었던 어른들은 어떤 고난도 영원한 것은 없고 구름처럼 흘러간다는 걸 매일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변하는 것 속에서 체득하지 않았을까. 모든 일에 이유와 의미를 찾기보다 그냥 흘려보내고 새 날을 살아갔던 게 아닐까. 매년 피고 지는 꽃처럼 우리에게는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잠자고 있는 생명력에 숨을 불어넣어 주기만 한다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 아니라 실패해도 계속하는 힘이 아닐까.


머리 위로 끝없이 펼쳐져있는 하늘과 아득히 아래 있는 골짜기를 보면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다가 아니고, 내 옆에 있는 가족과 친구가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더 큰 세계의 일부로 보호받고 있으니 뭐든 해봐도 좋다는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그렇듯 나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이야기다. 

영서는 수학 문제집에 농구공을 그리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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