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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r 11. 2022

중 2, 시험 때문에 긴장돼요

현준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되니 긴장된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은 초등 7학년 느낌이었다면 이제야 중학생이 된 것 같다는 말에 내가 물었다.


“시험 때문에?”

“저는 교사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성적이 좋아야 하잖아요. 좋은 성적을 쌓아야 하는데 시험을 망치거나 OMR답지를 잘못 써낼까 봐 걱정돼요.”

현준이는 친구 중에 고등수학까지 끝낸 아이도 있다며 자기는 이미 뒤처진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중년 남자에 담당 과목은 영어였다. 새 학년 첫날, 선생님은 임시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독서부장인 학생을 호명했다. “선정 기준은 성적”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바람에 우리는 야유했지만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어 해석도 성적순으로 시켰다.    

  

임시 학급 임원은 7등 환경부장까지였는데, 공교롭게도 내 짝이 7등이었고 나는 8등이었다. 이후 시간은 7등과 8등의 극명한 차이를 경험하는 나날들이었다. 7등까지 영어 해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짝은 자기에게 배당될지 모르는 부분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나는 그 모습을 편하면서도 불편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니는 좋겠다. 모르는 거 짝꿍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키순서로 정한) 뒷번호 애들 중에 짝이 공부를 제일 잘했기 때문에 한 친구가 나한테 한 말이었다.  

   

한 번은 짝이 아이들에게 인수분해를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내가 설명을 듣지 않자 아까 그 친구가 너도 포기하지 말고 들으라고 했고, 내가 안다고 했을 때는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고마운 충고까지 해주었다. 참 친절한 아이였다.      


그 시절, 반을 배정받고 출석을 부르는 순서가 성적순이라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은 아닐 테지만, 서로를 모르는 학기초에는 자기 등수만 알지 않았을까 싶다. 그 해 3월은 나에게 처음으로 느껴보는 다채로운 감정을 골고루 맛보느라 지루할 틈 없는 하루하루였다.      


이 일은 나에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사실 오랫동안 그렇게 기억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지금은 처음과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그때부터 공부라는 걸 제대로 해봤다. 매일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영어 단어장을 외우고 수학 문제집을 풀었다. 생각보다 하루 배운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두 번씩 공부하고 자기 전에 사자성어, 영어 숙어, 수학 공식을 메모지에 적어 교복 주머니에 넣고 학교를 오갈 때 외웠다. 일주일치 메모지는 모아서 주말에 다시 외웠다.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마음만 있으면 방법은 찾게 되어 있다는 걸 이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매일 새벽 2시 넘게 공부했다.   

  

한 달 뒤 치른 모의고사에서 나는 반 4등을 했고, 보름 뒤 중간고사에는 전과목 100점을 받았다. OMR카드가 없던 그 시절, 선생님이 수기로 채점을 준 점수를 반장이 부르면 학생들이 채점을 준 점수가 다르면 시험지를 들고나가 문제 푼 것을 보여주고 정정을 했는데 돌이켜보면 개인정보 노출에 관대하고 서로를 믿었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한문 시간에 내 번호에서 연달아 100점이 나오자 아이들이 놀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반전도 그런 반전이 없었고 역전도 그런 역전이 없었다. 그 후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고, 나는 짧은 시간에 성적 하나로 뒤바뀐 두 세계를 경험했다. 담임선생님은 교직생활 20년에 이렇게 단기간에 최상위권이 되는 경우는 처음이라며 내가 족집게 과외를 했거나 머리가 진짜 좋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과외를 하지 않았고 평범한 뇌를 가졌으며 훗날 과외선생님이 되었을 뿐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서 나의 잠재력을 이끌어내 준 담임 선생님에게 고마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짝을 경쟁상대로 여기고 다른 사람을 이겨야겠다는 동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의의 경쟁은 없다. 성적 하나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나 자신에게도 상처가 될 뿐 아니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을 받았을 때 맥없이 무너져내리는 걸 경험했다. 성장동기가 내 안에 있지 않고 경쟁에만 있다면, 그 동력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배웠다.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의지력이 약하다고 하는 건 옳지 않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타인의 감정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일수록 제로섬 게임 같은 고등학교 입시제도에서 상처받고 본래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과목별로 등급을 내는 폭력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나는 무수히 많이도 보았다.     


어른들이 가르쳐야 하는 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가 아니라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공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미미하기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좋은 성적이라는 건 상대적으로 높은 성적을 말하는 것인데 이건 나보다 잘하는 아이들이 없어야 하고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현준이가 선행을 많이 했다는 친구 때문에 불안한 이유다.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먼 미래 일까지 끌어안고 걱정하다 보면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즐기기 어렵다.      


학교 정기고사를 처음 보는 아이들이 등수보다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시험 준비에서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그런 내용을 쌓아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경험을 통해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배운다면, 시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성적이나 성공은 이런 과정들이 데려다주는 정거장 같다. 달콤한 성공이든 처절한 실패든 영원히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정거장과 비슷하다. 나나 아이들이나 정거장을 목적지로 두지 말고 내 안에 노선도를 만들어 멀리 아주 멀리 갔으면 좋겠다.   

   

“바나나 우유를 마셔봐. 인생 좀 살만해질 거야.”

스쿨버스에서 내려 허겁지겁 과외를 온 현준이에게 나는 바나나 우유를 줬다. 바나나 우유를 마시면서 이 시간을 달달하게 보내보자구.

마셔봐, 인생 좀 살만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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