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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ug 23. 2022

꼭지 딴 게 매운 고추예요

세나씨는 수학에 관한 한 순백의 상태로 나와 만났다. 12년에 이르는 교과과정이 세나씨에게는 한낱 바람 같은 시간이었는지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소수점 계산, 약분, 통분,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었다. 속 터지는 건 오직 내 몫, 허공에 집을 짓는 기분이었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인내심을 두드려 깨우는 시간이었다.     

“전에 다닌 수학학원 선생님은 저한테 종합적 사고가 부족하다고 그냥 수학 포기하라고 했어요.”

세나씨가 말했다.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꼈지만 시치미를 떼고 대꾸했다.

    

“스무 살 때, 나는 어른들은 정해진 자기 길을 의심 없이 사는 줄 알았어요. 어른이 되지 못한 나만 고민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갈등의 연속이더라고요. 세나씨가 수학을 포기할까 망설였던 것처럼 그분도 줄어드는 학원생, 임대료 때문에 학원을 옮길까, 다른 일을 할까 고민 중일지 몰라요. 결국 자기 문제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거예요.”     


국문학과, 체육학과를 지원하는 학생에게도 수학 성적을 요구하는 이유는 논리성, 끈기, 인내심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한 가지라는 것에 있다. 수학은 못하지만 성실한 학생이 있을 수 있다. 평가하기 편한 방식이 아닌, 공정한 평가를 위해 잣대를 여러 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선생님 고민은 뭐예요?”

“음... 저는.... 과외가 하기 싫어요. 이십 년을 같은 걸 가르치는 건 정말이지 사람을 질리게 하거든요.”  

   

나는 수학 장수로 손님에게 사용설명서 같은 걸 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얼마 전 갔던 순대국밥을 파는 식당은 매운 고추는 꼭지를 따고, 맵지 않은 고추는 꼭지가 있어서 손님이 골라서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대단한 맛과 특별한 메뉴는 없지만 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있는 식당이 (이 일을 하는 동안) 나의 롤모델이다.  

    

어떤 이유로 과외를 그만두더라도 서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면, 내가 그 학생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생계가 달린 일에 대범하기는 어렵지만 돈 때문에 학생들의 기분을 맞추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 닦달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나를 피폐하게 만들고 아이들에게 사기 치는 기분이 드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접어두고, 손님이 오늘 하루 불쾌한 일없이 존중받았다는 기분이 들면 좋겠다. 대접받아본 사람이 스스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느끼고 공부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나를 ‘친절한 어른’으로 기억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어떤 대학을 가느냐가 지금은 전부처럼 보이겠지만, 실패하면 내 인생이 끝나는 것 같겠지만, 이미 재수하는 것만으로 남보다 뒤처진 것 같겠지만, 서울대를 간 사람도 확신 같은 건 없을 거예요. 그곳에는 또 다른 불안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선생님이 스무 살이라면 대학을 가지 않을 거예요?”


“부모님의 지지 없이는 어렵겠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책을 읽으라고요.”    

 

겉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길도 나한테 맞지 않으면 소용없더라고요. 예전에 나는 알지 못했지만요. 저는 삼십 대 중반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일찍부터 책을 읽었다면, 자기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스무 살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수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자 세나씨는 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스스로 놀라워했다. 12년간 외면했던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의 경이가 얼굴에 드러났다. 이쯤 되면 수학이 뭐가 중요한가.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것이 생각만큼 대단한 게 아니었다는 경험이면 충분하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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