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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r 26. 2022

아무것도 아니어도 충분한

단단한 행복이 있는 섬 '돈없이도'02

늦은 오후 집에는 나 혼자였다. 작은 마당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던 집. 나는 마당 가장자리 턱에서 발을 번갈아 뛰며 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해가 구름에 가렸다 나오느라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하는 마당에 나는 문득 멈춰 섰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묘한, 쓸쓸하고 적막한,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싫지 않은 감정 속에 한동안 서있었다.     


지인의 봉사단체에서 하는 바자회가 있어서 나갔다가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곧장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교환할 물건이 있었고 나중에 다시 나올 일이 귀찮아 쇼핑몰로 향했다. 쇼핑몰에 도착해 볼일만 얼른 보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펼쳐 드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퍼졌다. 세상과 내가 분리되어 온전히 혼자인 것 같은, 나만의 세계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했던 건 이런 순간들이었다. 방바닥에 엎드려서 라디오를 들으며 뭔가를 끄적이고 라디오에서 녹음한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따라 적던 날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스스로 채워지는 기분을 느꼈고 그럴 때일수록 게을러지기보다 성실하고 정성스러워졌다.     


그날 오후 마당에서 내가 느낀 건 삶의 무상함이 아니었까.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이고, 삶이란 공기나 물처럼 아무 색깔도 소리도 없는 그런 거라는.    

 

얼마 전 친구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는 동안 망설이지 말고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내게 친구는 물었다. 어차피 죽음이란 게 정해져 있다면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지 않냐고.   

  

“선생님 반딧불 본 적 있으세요? 가족끼리 어디를 갔다 오는 길에 희미하면서도 환한 빛을 내는 반딧불을 봤는데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몽환적이고 신비로웠어요.”     


수업을 하는 중에 정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정완이는 아마도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정완이네 가족과 반딧불이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쳤고 서로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형도, 엄마도 순간 말을 잃고 반딧불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어둠 속에 한참을 서있었다고 정완이가 말했다.     


동네 과외샘인 나로서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문제가 안 풀릴 때는 아, 이거 문제가 참 어렵다야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풀어봐야겠구나, 라는 여유로운 마음, 그게 바로 수학적 용기야.”      

여유로운 마음, 다시 시작할 용기, 살아갈 용기 이런 건 어떻게 생길 수 있는 건지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생각해봤다. 그러다 교회 종소리가 들리던 마당, 죽음, 반딧불이가 나를 어떤 생각에 이르게 했다.     


자연의 의도 없는 무자비함 속에서 피어나는 눈부신 장면을 묵도하는 일은 커다란 세계를 의식하고, 사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감각을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그 감각을 몸에 쌓다 보면 샘에 물이 차듯 용기가 내 안에 채워지는 게 아닐까.      


내변산을 갔을 때다. 높은 산이 아니어서 방심했는지 곳곳에 땅이 얼어있었지만 이따 아이젠을 찰 생각으로 꾸역꾸역 올라가다가 바위로 된 구간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로프를 잡아 사고는 면했지만, 배낭 옆에 있던 물통이 탕탕탕탕, 소리를 내며 바위에 부딪치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는데 내가 저렇게 될 수 있었다 싶어 아찔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파묻을 기세로 쏟아지는 눈을 헤치고, 강풍에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고 걷다 보면 죽음은 가까이 있고 죽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비로소 몸으로 와닿는다. 뿌리째 뽑혀 누워있는 나무가 잘못해서 그리 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제야 나를 붙들고 있던 자의식에서 놓여나 홀가분해지는 것 같다. 


지면과 멀어질수록 나 자신과의 거리도 멀어지는 것 같다. 밤이 있어 아침이 기다려지듯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에야 삶은 더욱 소중해진다.          

  

지리산에서 며칠에 걸쳐 걸을 때, 졸리면 평평한 돌을 찾아 누워 자다가 일어나서 다시 걸었다. 한 번은 한 커다란 배낭을 멘 아저씨가 “아까 자던 분이네, 와서 이거 한 잔 해요”하면서 맥주를 줘서 얻어먹으며 지난주 갔던 산, 다음에 갈 곳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뭐하는 사람인지, 몇 살이냐 하는 건 서로 묻지 않았고 그저 ‘함께 걷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 그런 시간이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바뀌는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에 지금의 결과는 내 잘못이 아니다. 무위를 이겨내고 살아가는 게 삶의 본질이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단 하나의 의미이자 가치가 아닐까.    


마흔다섯에도 꿈을 꿀 수 있고, 용기, 희망, 가능성이란 것은 한 번만 주어지는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닌, 매년 돌아오는 봄처럼 내 가까이에서 항상 있는 거였다. 잠시 잊었다고 사라진 건 아니다. 그저 사는 건 좋은 거라는 감각을 다시 되살리기 위한 노력만 하면 된다. 단, 돈이 들지 않을수록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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