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무로 만든 무나물, 상상과 다른 맛

by 김준정

하루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은덕선생님이 친정어머니가 농사를 지은 거라면서 무를 주었다. 일반 무보다 작은 초록무였는데 무청까지 연하고 싱싱해 보였다. 무를 조금 잘라서 깎아먹어 봤는데 맵지 않고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다음날 아침, 무나물을 만들기로 했다. 무를 썰다가 문득 일 년 만에 무나물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생채는 자주 만들어도 무나물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에만 만드는 것 같다. 식초와 설탕의 양을 늘려서 맛을 보완할 수 있는 무생채에 반해, 무나물은 무의 슴슴한 맛으로 먹기 때문에 무가 맛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곱게 채를 친 무에 소금을 뿌려 십 분을 절였다. 프라이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조금 볶다가 뚜껑을 덮고 5분을 익혔다. 뚜껑을 열자 향긋한 무냄새가 확 올라왔다. 쪽파를 썰어 넣고 유리로 된 반찬 그릇에 담았는데 이렇게 예쁠 건 뭔지. 새하얀 무와 파란 쪽파의 청량한 색감을 잠시 바라보았다.


무나물을 입에 넣는 순간 아, 무가 이런 맛이었지 하고 기억이 되살아났다. 거의 일 년 동안 나는 특유의 시원하면서도 달큼한 무 맛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뜻밖에 등산을 가서 산우들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나와 회원 세 명은 길을 잘 못 드는 바람에 정해진 코스에서 5km쯤 빼먹어서 선두보다 뻘리 내려온 날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일찍 내려올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뒤풀이를 예약한 식당 앞 공터에서 맥주를 마시며 회원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송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내려올 건데 뭐더러 올라가나 모르겄어.”


산악회 버스를 운행하는 수송대장이 평소 이런 생각을 하며 회원들을 봤을 걸 생각하니까 나는 웃음이 났다. 새벽에 차에서 내려서 8시간에서 10시간 후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는 회원들을 보고 왜 저런 사서고생을 하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게 아닌가.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딱한 회원들에게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느냐’고 물어봤다.


동박: 산이 거기 있으니까.

나: 그건 조지 맬러리라는 산악인이 이미 한 말이거든?

산꾼: 어차피 배 고플 건데 밥은 왜 먹고, 어차피 일어나야 하는데 잠은 왜 자?


산꾼님의 말은 등산 말고도 다른 일도 반복되는 건 마찬가지라는 뜻일 거다. 하지만 수송대장은 일하고 먹고 자는 일은 필수적인 일이지만, 등산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산꾼: 연하는 왜 등산을 하는데?


연하는 산악회에서 나의 닉네임이다. 그날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하지 못했지만 무나물을 만들면서 대답이 생각났다. 내게 등산은 일하고 먹고 자는, 그 필수적인 일을 순조롭게 하게 해주는 것 같다고.


일상적으로 하는 밥 하기, 설거지, 청소하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등등을 그냥 하다 보면 무나물 맛에 감탄하는 일처럼 특별한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가을이 깊어지면서 기온이 내려간 땅속에서 무가 맛이 드는 일처럼 세상에는 내가 계산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할 때 목적과 이유를 따진다는 게 부질없는 게 아닐까. 나는 어제도 했던 반찬 만들기를 오늘도 했을 뿐, 무나물의 맛을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가을무로 만든 무나물, 그건 상상과 다르니까.


무처럼 슴슴한 날들을 살아가다 보면 감탄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순간을 자주 만나려면 그냥 하기를 잘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반복되는 삶의 리듬에 나를 맞춰가는 일이 아닐까.


일요일에 등산을 다녀오면 윤활유를 바른 것처럼 잘 흘러가는 기분이 든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니 어떤 일을 할 때 이유를 덜 생각하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어떤 일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시간과 수고와 성과를 저울질할 때가 있다. 굳이 장을 봐서 재료 다듬어서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음식을 배달을 시키거나 빵을 사 먹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글을 쓰다가도 이런 글을 써서 뭐 하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공모전에 응모할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공상과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된다. 지금 나의 모습 중에 과거에 계획한 건 별로 없는데도 어째서 미래를 상상하고 걱정하는 걸까.



KakaoTalk_20251216_065910795.jpg 이렇게 예쁘기까지
KakaoTalk_20251216_065926318.jpg
KakaoTalk_20251216_065948052.jpg 은덕샘이 준 초록무와 정성스럽게 다듬은 쪽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해하고 뻔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