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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아빠 눈을 볼 수 있게 되었어

by 김준정

낯선 아줌마가 말했다.

“아줌마 집에 가서 살래? 아줌마 집에 너만 한 아이들이 많아.”

처음 보는 아줌마의 손을 잡고 막 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길 끝에서 아빠가 나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아득히 먼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금세 뛰어와 나를 와락 안아서 들어 올렸다. 자기 집에 가자던 아줌마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나는 7살이나 8살쯤이었다.


부모님 계모임이 있던 날, 이층 양옥집이 많았던 그 동네로 갔다. 오락실에 가고 싶었던 오빠가 밖을 나갔고,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 집에 있던 언니들과 어색하게 있는 게 싫어서 오빠를 따라갔다. 오빠가 오락하는 걸 구경하기도 지겨워져서 혼자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전에도 그 집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는지 나는 그 집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완전히 골목을 벗어나서 도로가를 걷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내가 외운 번호가 아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중에 생각나는 건 도로가를 걷다가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간 것, 그리고 나왔을 때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줌마가 내게 말을 걸었던 일이었다.


아빠를 만났다는 안도감보다 아빠가 화를 낼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왜 혼자 아무 데나 다녔냐고 할까 봐 아빠 눈치를 봤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나는 그게 평소의 아빠와 달라서 낯설었다. 내가 사라진 시간이 네다섯 시간은 족히 되었는지 날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나를 안고 걸었다. 아빠는 아마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간신히 벗어난 것 같았다.


멀리서 달려오던 아빠, 젊은 아빠,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던 아빠. 내 마음속에 그런 아빠가 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어리고,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로 살아가게 하는. 영원히 독립하지 못하게 하는.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면서 어째서인지 아빠를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내가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존재로 보고, 여자의 최고의 목표는 개인의 성취보다는 안락한 가정을 이루는 게 되어야 한다는 게 아빠 생각이었다. 아빠한테는 당연한 일이었고, 내가 행복하길 바래서 한 말이었다. 권위적이지만 자식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빠였고, 이전까지 나는 아빠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아빠는 매일 내게 전화를 해왔고, 다툼 끝에 전화를 끊는 일이 많았다. 아빠는 나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사는 여자들이 많다고, 이혼한 여자를 남자들이 얼마나 쉽게 보고 접근하는지 말했다. 아빠한테 내 감정을 아무리 설명해도 아빠는 듣지 않았다. 아빠한테 이해받지 못하는 일은 예전에 나와 대치되는 일이었다. 아빠의 비난이 상처가 되었지만 나는 과거의 나와 결별하는 길을 택했다. 그 순간이 아빠가 처음으로 딸, 여자가 아닌 나라는 사람을 보게 된 때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아빠는 어떤 틀에 맞춰서만 나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딸에게 엄마를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딸은 피해자일 뿐인데, 엄마를 이해까지 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너는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될 만큼 강해지고 싶었다.


4년간 딸과 살면서 우리만의 안정과 규칙을 만들어 갔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2주마다 아빠를 만나고, 나에게 아빠 얘기를 해준다.

“일부러 아빠 근황을 알려주는 거야. 엄마 얘기도 아빠한테 해주거든. 어쩌다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냥 미안하다고.(울지는 않았다) 그러자 딸이 말했다.

“난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데? 난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것보다 따로 사는 게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해.”

“뭐가 좋은데?”

“엄마는 재미있고, 친구 같아서 좋아. 아빠는 (밥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하는 걸 보면) 함께 살면 눈치 보게 될 것 같거든? 하지만 의논 상대로는 최고야. 아빠랑 얘기하면 나를 존중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준다는 게 느껴져.”


딸의 말로는 함께 살면 둘의 장점을 충분히 느낄 수 없을 거란 뜻 같았다. 자기만의 ‘정신승리’ 인지 나를 위로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강요받은 게 아니라면 그것대로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남녀관계일뿐 아이라 생활, 육아, 각자의 부모를 포함한 가족까지 얽혀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결론은 ‘나쁜 것만 있지 않았다’는 거다. 이걸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모든 걸 부정하면 난 피해자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아이의 아빠가 가해자가 되면, 나는 아이가 아빠 얘기만 꺼내도 예민해지고 화를 내게 된다.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글을 썼다. 시작하면 혼자서 끝을 내야 하는 글처럼 살고 싶었다. 아빠와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면서 나를 묶어 놓았던 사슬을 발견했다. 그건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동의했거나 혹은 나도 모르는 새 둘러쳐진 것이었다. 그것들을 풀어낼 때마다 비명이 나왔지만, 나는 이제야 만나게 된 내가 반가웠고 내가 발견한 것들이 소중했다.


휴가 기간 동안 대구로 가서 아빠에게 밥을 차려드렸다. 우럭탕, 백숙, 동태전 등등 끼니때마다 다른 반찬으로 정성껏 차렸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믿지 않는 아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우리는 밥상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지만, 때로는 말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나직이 말했다.


아빠 그거 알아? 이제야 아빠 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몇 번을 덮었다가 다시 쓰기를 거듭했다. 내 두 발로 걸어가기로 했다면 첫 번째 책은 이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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