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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Apr 27. 2019

<고슴도치의 소원>을 읽고...

천 개의 가시가 돋친 고슴도치, 정작 가시는 고슴도치를 찌르고 있는지도.

'먼저 다가가는 것이 두려운 세상의 모든 소심이들을 위한 이야기'

<고슴도치의 소원>을 읽었다.


사서 걱정하기의 달인, 세상 근심은 혼자 다 지고 있고, 고독을 좋아하지만 외로워하고, 외롭지 않은 척 온갖 핑계를 대지만 외로워 보이는 소심한 고슴도치의 이야기.


고슴도치에게는 가시가 버팀목이 되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오지 마'라고 말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끊임없이 누군가라도 와주기를 기다리는 고슴도치.

혹시 '내 가시는 아주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주려고?' 누가 와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비록 함께 춤을 추다가 '넘어져서 여기저기 피가 흘러도 춤을 잘 춘다는 말을 해주려고?' 누군가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한편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건 절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려고' 누군가 올지 모른다고 상상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고슴도치가 내 남편 같았다.

뾰족하고 따갑기 그지없고, 가까이 다가가기에 불편해 보이는 사람.

자기만의 가시 돋친 몸으로 버티지만, 금세 자기만의 동글로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사람.

때로는 '가시가 있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도 몰라, 춤을 추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 불러, 내가 끓인 차는 내가 먹어도 맛이 없어,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하는 사람.


내가 볼 수 없는 그의 동굴 안에서 그는 이런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은 아닐까.

13여 년을 살면서, 그래도 우리 사이엔 아이가 세 명 태어났고, 나는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이 많지 않을까.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를 걸으며 <달과 6펜스>에 대해 이야기해주던 그가 좋았다.

나는 결혼하면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미래가 너무 행복해 보였고 기다려졌고 꿈만 같았다.

그렇게 상상했던 나의 미래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현실은 내가 고슴도치가 되어 앉아있다.

나는 고슴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고슴도치가 아닐까. 아니, 나도 고슴도치인 것 같다.


자기가 아는 동물들이 다 가시가 있다고 상상해보았다.
모두 다 고슴도치네 집으로 왔다. 코끼리는 가시 때문에 나무에 올라갈 수 없었다. 가지마다에 걸렸기 곰의 가시에서는 조금 전까지 먹으면서 돌아다닌 케이크의 꿀이 흘러내렸다.
나비의 날개에도 가시가 돋아 있었다.
잉어와 메기는 물 위로 가시가 가득한 머리를 내밀다가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시가 돋은 개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두더지는 자기 가시 위에 지렁이를 얹어 놓고 장난을 쳤다.
부엉이의 가시들은 서로 편지를 쓰고 있었다.
달팽이의 등엔 가시 집이 있었다.


고슴도치는 이 세상에서 가시가 없는 유일한 동물이었다.

<고슴도치의 소원>, 톤 텔레헨, 아르테


고슴도치는 억울할 것 같다. '나만 가시가 있는 게 아니라고!', '나만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게 아니라고!'

그럴수록 고슴도치의 가시는 꼿꼿하게 세워지고, 다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살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누군가 다가와주기를 기다리는 고슴도치.


나는 이상해, 겁을 주고, 외롭고, 자신감도 없어. 내겐 가시만 있어. 그리고 누군가 나를 찾아와 주길 하면서 또 누군가 오는 걸 원하지 않아.....

나는 대체 어떤 동물이지!



서로가 가시를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유머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는 것도 춤이라고 하면 어때."
달팽이가 대꾸했다. "멈춤, 그렇게 부르는 거야."

<고슴도치의 소원>, 톤 텔레헨, 아르테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는 것도 춤이라고 하면 어때."달팽이가 대꾸했다. "멈춤,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내가 '유머작가 달팽이'가 될 수 있다면 좀 더 부드럽게 상황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렵다. 결혼생활이란!



'그'는 고슴도치 나는 달팽이

나는 천천히 기어서 그에게로 간다.

그는 가시를 세우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저 인상을 좀 펼 수만 있다면 더 멋져 보일 텐데'

달팽이는 천천히 기어서 이윽고 고슴도치 앞에 다가갔다.

'네가 가시를 조금만 낮춰준다면, 내가 너와 친구가 되어줄게'


고슴도치는 눈을 들어 달팽이를 본다.

'그래도 내 가시에 찔리면 따가울 거야. 나도 내 가시가 따가운 걸.'

달팽이는 만만의 미소를 띄며 말한다.

'괜찮아, 따가울 땐 나의 집 속으로 피신해있을게, 나에게는 멋진 동굴이 있거든!'


고슴도치와 달팽이는 친구가 되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가시는 스르르 잠이 들고

고슴도치는 달팽이를 보며 생각한다.

'함께 있어서 참 다행이야'

달팽이도 고슴도치를 보며 생각한다.

'다들 너의 가시를 보지만, 나는 너의 마음을 볼게'


달팽이와 고슴도치는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끔은 나도 그런 해피엔딩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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