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의 자신만의 글쓰기를 위한 장소, 시간, 특별한 루틴이 있으면 좋다. 그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있고 통제한다는 것은 습관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작곡을 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완전히 나 자신이 되고 철저히 혼자가 되고 아주 유쾌한 기분일 때 - 예를 들어 마차로 여행을 하거나 식사 후에 산책을 하거나 잠이 오지 않는 밤 중에 -바로 그런 상황에서 악상이 가장 잘, 가장 풍부하게 흘러나온다.(중략) 그것을 억지로 불러낼 수는 없다."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에서 저자는 이렇게 모든 사람이 모차르트처럼 될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는 어딘가 그와 닮은 데가 있다고 한다. 다만 우리가 상상력을 충분히 믿지 않으며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기 신뢰는 정말 중요하다. 당신이 글쓰기를 시작하면 목에서 힘을 빼고 자유롭고 선한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게을러져라. 글을 던져버린 것처럼 느껴라.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고 그냥 이야기를 써보면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지켜보라."
오랫동안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글 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의 글은 발전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경직되고 한결같던 글들도 자꾸만 쓰다 보면 편안하게 읽힐 때가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글쓰기 앞에서는 경직되기가 쉽다. 누가 평가하거나 순위를 매기는 것은 아니나, 자기 스스로 검열하고 과연 내가 글을 써도 될지 말지를 너무나 빨리 결정하는 듯하다.
글쓰기는 너무나 쉽고 속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든 작가의 경험으로 보건대, 글쓰기는 시간과 노력이 충분히 따라야 할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펜을 잡았는데 톨스토이처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쓰는 동안 줄곧 듣는 사람을 사로잡아야 한다. 어느 면에서는 실제로 말할 때보다 더 그래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래 쓴다고 해서 쉬울 리도 없다. 다만 가능성은 꾸준히 쓰는 사람에게 더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봄직 하다. 아이들을 가르쳐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매일 일기를 쓰는 아이와 쓰지 않는 아이는 글 쓸 때 자세와 눈빛부터가 다르다. 진심으로 몰입하고, 편안하게 생각하고, 몸에 힘을 빼고 즐겁게 쓴 아이의 글이 더 잘 읽힌다. 그것은 자명하다. 자신이 쓰면서도 무엇을 써야 할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 아이의 글은 읽는 것도 고역스럽다. 읽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물어봐야 하거나 빠진 부분을 쓸 수 있도록 지도하게 된다. 글 쓸 때 읽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쓴다면,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하고, 기승전결의 순서를 생각해봐야 하고, 표현할 때에 신경을 쓰게 된다. 혼자 읽고 덮어버릴 글과, 누군가에게-특히 내가 좋아하고 편안한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쓸 때는 분명 글 쓸 때 마음부터 달라진다. 그리고 글의 결과도 달라질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 싫어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글,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 이 세상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글,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보내는 글 등을 비교해본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글이 달라질 것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한 번이라도 더 가다듬고, 수정하고, 정성을 기울여서 쓰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글은 바뀐다. 더 나아가, 결국엔 쓰는 사람도 바뀐다.
저자가 '주관적 글쓰기의 문제점으로, 즉 듣는 이에게 아무런 관대함도 갖지 않고 아무런 생생한 교류도 나누지 않는 것'을 지적한 것은 듣는 이를 배려하는, 관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이유이다.
체홉은 동생의 글에 대해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의미 있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고, 오직 자기만족만 있어. 그러므로 너는 독자를 위해 쓰고 있지 않은 거야. 그 지껄임이 너를 기쁘게 했기 때문에 네가 그 글을 썼던 거야... 주관성은 끔찍한 것이다. - 작가의 형편없음을 거듭 드러낸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은 정말 끔찍하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심리적 고민이 5분의 4를 차지하고 마치 수술대 위에 자기 내장을 모조리 드러내는 듯한 그런 장편을 써서는 안 된다. 아무도 그런 글에는 관심이 없다. 더욱이 삼차원이라는 것 때문에, 모든 독자는 단번에 당신이 속물이며 이기주의자이고 자신 이외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독자는 시들해지고 지친 느낌으로 생각할 것이다. - "왜 내가 더 읽어야 하는 거지? 작가가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그는 오로지 독백하고 있을 뿐이야."
- 브렌다 유랜드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 중에서.
좋은 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경험으로 인해서 또다른 사람의 삶이 바뀐다는 것은 마법같은 일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기적이라고도 말한다.
우리삶의 마법같은 일, 기적같은 일이 이루어진다는것이 때로는 판타지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막상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일들을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글은 유일하게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기대고 가능성이고 상상이다. 그 상상이 행복으로, 열매로, 어떤 기회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에 글이 없다면, 사람들은 의무만을 다하면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글로서 사람들은 미래를 꿈꾸고, 과거로 돌아가고 현재를 말한다.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즐거움과 기쁨과 감사와 보람이 넘치고, 글로 인해 누군가는 삶을 이어가고 희망을 되찾는다. 누군가는 지식을 배우고 누군가의 지혜를 얻는다.
사람들은 글을 좋아한다. 태어날때부터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은 글을 남긴다. 생일카드부터 유서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출생신고부터 사망신고까지. 우리 삶에는 글이 있다.
나의 글을 내가 남기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글은 자유로운 것이다. 쓰는 즐거움이 있고, 보는 만족이 있고, 받는 기쁨이 있다.
나누는 행복이 있고, 읽는 보람이 있고 읽은 후의 감사가 있다.
글이 주는 기쁨을 충분히 누리면서, 일상의 행복을 만들어가면서, 글쓰기 생활을 영위해갈 수 있다면 우리 삶의 만족도가 달라질 것이다. 자신이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행복과 자신 있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여도 좋다. 글쓰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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