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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Jun 30. 2020

김동인 작가의 <배따라기>를 읽고

중 1 딸과 엄마의 책으로 대화하기

제목 : <배따라기>를 읽고


날짜 : 2020.06.29. 월


오늘은 <배따라기>라는 글을 읽었다. 이 글은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많진 않은데, 완전 저 세상에서 온 것 같은 글자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것 같은 시와 합쳐져, 외국어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글에 제목이 왜 배따라기인지, 배따라기가 뭔지 궁금했다.

여기서도 부부가 나오는데, 다른 글들에 등장한 부부와 마찬가지로 사이가 안 좋고 아내는 남편에게 맞기도 한다. 읽으면서 이 글들이 써질 땐 아내가 남자에게 맞는 내용을 넣는 게 유행인가 싶었다.

또, 여기에 사투리가 등장하는데, "그럼 어디 들어봅시다그려", "한번 이야기해보소"와 같이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사투리)도 있지만, "거 좀 밟아서 발이 부러뎃쉐까?", "형님, 나도 변했거니와 형님도 되게 늙으셨쉐다!"와 같이 발음도 어렵고 쓰기도 헷갈리는 사투리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어느 지역의 사투리고 왜 이 글에 등장했을까? 굳이 이런 사투리 안 써도 다른 사투리도 있는데 말이다.



엄마의 참견 >>>

이 소설은 1921년대 일제강점기에 발표되었는데 작가가 직접 소개하길, '아마 조선에 있어서 조선글, 조선말로 된 최초의 단편소설이다’라고 말했다고 해, 그 정도로 오래된 소설이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어휘나 사투리가 많았을 거야.


소설 앞부분에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라는 표현에서 힌트가 있는데, 

'배따라기'라는 말은 뱃놀이하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의 출발 광경을 표현하는 춤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흔히 어떤 잔치나 특별한 의식을 행할 때 춤과 노래, 악기로 표현하잖아. 예전부터 그런 의식이 있었던 것이지.


소설 속에 '대동강, 평양, 영유'라는 표현이 나오는 걸로 보아서 장소가 평양의 영유, 대동강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추측할 수 있어.

이야기 속의  '나'는 이 년 전 한여름을 배따라기의 본고장인 영유에서 지내면서 배따라기에 대해 알게 돼.


"영유, 이름은 모르지만 ×산에 올라가서 내다보면 앞은 망망한 황해이니, 그곳 저녁때의 경치는 한번 본 사람은 영구히 잊을 수가 없으리라. 불덩이 같은 커다란 시뻘건 해가 남실남실 넘치는 바다에 도로 빠질 듯 도로 솟아오를 듯 춤을 추며, 거기서 때때로 보이지 않는 배에서 ‘배따라기’만 슬프게 날아오는 것을 들을 때엔 눈물 많은 나는 때때로 눈물을 흘렸다."



최근에 읽어왔던 소설에서도, 이 작품에서도 방언이 많이 나와서 어려움을 느꼈을 거야. 작가가 글을 쓸 때에 방언을 택하는 이유는, 그 시대와 지역, 사람들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야. 그렇게 하면 훨씬 사실적으로 느껴지고, 실제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나거든. 그리고 실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문학작품에서 사투리를 보게 된다면 유심히 관찰해봐, 사투리 역시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우리의 말과 글이기 때문이야.


이 이야기는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대참사를 그리고 있어.

이쁜 아내와 자신의 남동생이 너무 가깝게 지낸다고 오해한 그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두 사람을 내쫓아버리거든.  다음 날 낮에 아내의 시체가 바다 위에 떠오르고, 이 때문에 동생은 집을 나가버려. 결국 형은 20년 동안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며 뱃사람이 되어 떠돌아다니지만, 동생을 만나지 못해.

그러나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걸까. 10년이 지나 기적처럼 동생을 만나게 되지만 동생은 "형님, 그저 다 운명이웨다!"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떠나버려. 그리고 또 10년이 흘렀지만, 동생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야.


살아가면서 서로를 오해하고 나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비극을 만들지 않으려면 대화를 하고, 오해를 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아. 아무리 가족이라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이지. 그건 남과 다름없고, 남과 한 집에서 살 이유는 없으니까.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작가가 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 역시 서로를 오해하지 않고 많이 이해하는 가족이 되자. 오해는 서로가 멀어지게 되는 지름길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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