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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대끼는 삶 Sep 06. 2024

앎이란?(1)

공통유전자의 오감 인식체계

"나는 내가 본 것만 그릴 수 있다. 색은 하루 종일 나를 힘들게 한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화풍을 만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클로드 모네(Claud Monet: 1840~1926)가 한 말이라고 한다. 빛은 물질과 상호작용한다. 상호 작용의 결과 흡수되거나 반사(산란)하거나 아니면 투과한다. 반사한 빛을 눈으로 보면 물체의 색이 되고 투과한 빛을 눈으로 보면 투명체의 색이 된다. 모든 빛이 투과하면 투명한 유리처럼 색이 없다. 노을이 붉은 것은 그 시각엔 산란한 빛 중에서 붉은색 계통의 빛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빛은 색의 마술사이고, 눈은 빛이 지나는 통로이고 인간은 색의 창조자이다.


모네는 튜브물감과 이젤을 들고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 자연과 호흡하면서 풍경을 화폭(canvas)에 담았다. 그런데 풍경은 시시각각으로 색이 변했다. 매 순간 빛의 작용이 변한 것이다. 자연의 고유한 풍경이나 색은 없었다. 자신이 본 것,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신의 인식체계에 나타난 풍경을 놓이지 않고 캔버스에 담기 위해서는 빠르게 붓을 움직여야 했고, 붓의 터치는 투박하고 강해졌다. 빠른 터치로는 대상의 형태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고, 인식 체계에 박혀 있는 '인상'을 중심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세 시간 만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에 이런 경향이 잘 드러난다. (그림 참조)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모네는 파리 근교 지베르니(Giverny)에 스스로 연못을 만들고, “내 그림의 주제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매  순간마다 변화하는 수면의 반사광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말년에 연작으로 그린 수련의 대상이 '빛'이라고 하였다. 모네의 이 표현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엄격하게 해석하면 바르지 못하다. "내가 그린 것은, 빛이 내 의식체계에 만든 '인상'이다."라고 하였다면 '인상'에 일관된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빛은 단지 파장의 길이가 대강 400nm~800nm 사이에 있는 전자기파일 뿐이다. 빛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색은 인간의 인식체계가 만든 결과물에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색은 실제로 존재(existence)하는 실재(reality)가 아닌 것이다. 


시각 외에 다른 감각도 실재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소리는 공기의 파동이 귀로 들어오면 인간의 인식체계가 작동하여 음빛깔을 구분하고 존재를 확인한다. 즉 소리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파동(음파)이다.  


냄새도 마찬가지이다. 냄새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기체 상태의 물질이 코로 들어오면 인식체계가 작동하여 냄새를 구분하고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맛도 마찬가지이다. 맛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액체(이온) 상태의 물질이 혀에 접촉하면 인식체계가 작동하여 맛을 구분하고 단짠의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오감으로 감각한 색, 소리, 냄새, 맛, 촉각(부드러움 등)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용체인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것을 인식체계가 작동하여 만들어 낸 산물인 것이다. 모네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더라도, 감동 뒤에는 이런 인식체계가 돌아가도 있다는 것을 가끔씩 생각해도 감동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모네가 그린 '수련이 핀 연못'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모네가 눈으로 감각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대상은 모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서 '존재'와 '앎'이란 근본적인 문제와 부딪친다. 


인간은 오감을 가지고 있어서 감각한 것은 모두 있다고 믿는다. 무엇인가가 눈에 보이면 뭔가가 있다고 믿는다. 뜨는 해가 있고 수련이 있다. 또 무언가가 만져지면 있다고 믿는다. 어찌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내 몸을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부정해도 생각하는 자신은 부정하지 못하였는데(Cogito ergo sum), 데카르트에겐 의식이 감각보다 앞섰다고 하겠다. 


그런데 엄격하다는 과학에선 보이지 않는 것을 있다고 믿기도 한다. 오감은 보지 못해도 논리가 본 것이다. 인간의 인식체계가 존재 여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승리하는 순간이다. 보이지 않는 질량을 가진 물질은 암흑물질이라고 하고, 오감으로도 확인이 안 되는 에너지를 암흑에너지라고 이름을 부여하고 존재를 믿으면서, 열심히 찾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를 찾는 데 성공한다면, 그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오감일 것이다. 인간에겐 오감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오감으로 감각한 것이 모두 존재하고, 감각의 내용인 색, 소리, 냄새 등도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내가 감각한 것과 다른 사람이 감각한 것이 같은가? 하는 문제이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을 앓았는데, 백내장 수술 전후로 '인상'의 색이 붉은색 계통에서 푸른색 계통으로 바뀌었고, 그러한 변화는 캔버스에 잘 반영되어 있다. 같은 대상을 다르게 보는 백내장 수술 전후의 모네는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동일한 대상을 여러 명이 같이 오감 할 때, 각자의 감각내용이 똑같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다르다면 어떤 것이 맞는가? 모두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같으므로 의미가 없다. 이 질문을 모네의 그림을 마주하면서 하게 되면, '미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미학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은 다행스럽게도 과학이 제시할 수 있다. 


오늘날 과학이 밝힌 바에 따르면 생명체가 가진 유전자(DNA)는 진화 과정에서 크게 바뀌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에 의하면 사람과 닭은 60%의 유전자가 같고, 고양이와는 90%, 침팬지와는 유전자의 98.9%를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개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전자 공유 비율은 무려 99.9%라고 한다. 0.1%의 유전자 차이가 개성이 넘치는 인간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유전자 하나의 차이가 하나의 기능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조합으로 많은 차이를 만들 것으로 생각되지만, 0.1%라는 숫자는 옆에 있는 사람과 내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높은 비율의 공통유전자는 인간의 인식체계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각한 내용은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공통유전자가 감각내용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주체는 인간이므로, 모든 판단의 주체도 인간이 되어야 한다. 다른 존재에 판단을 맡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들이 오감으로 감각한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존재 여부는 보고 만져서 판단한 것이 아니고, 공통유전자에 기반한 인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가끔은 생각하는 것이 좋다. 모네가 존재를 그리지 않고 '인상'을 그렸듯이. 


참고 동영상

** 지식의 분류와 절대진리 https://youtu.be/Dn1ecAYuU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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