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온통 코로나19로 세계가 두려움에 떨었다. 설 연휴 때까지만 해도 가족과 친지, 친구들과의 만남은 당연했고,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지되었다. 마스크를 쓴 사람보다 안 쓴 사람이 훨씬 많았다. 설 연휴 마지막 날, 그와 나는 임산부니까 남들보다 조심해야 한다는 이유로 방한용 마스크를 쓰고 서울역에서 전시를 보고, 남대문을 거쳐 종로, 광화문까지 누비기도 했다. 그러나 이삼일 후 나는 불안에 떨었다. 뉴스에선 경복궁과 우리가 지나친 몇 곳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연휴가 지난 이틀 후 요가 수업에 가는 길이었다. 혹시 몰라 들른 매장에서 마스크를 구매했다. 방한용 마스크와 KF90 마스크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그 날만 해도 내일, 혹은 며칠 후에 와서 마스크를 사도 되겠지 여기던 때였다. 그러나 웬걸. 다음날부터 동네 약국, 마트, 매장마다 마스크를 구하는 사람들이 줄 섰고 구매한 사람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 마트와 몇몇 매장 앞에선 새벽부터 줄 선 모습도 SNS에 쏟아졌다. 마스크 대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마스크 사기에 열중했다. 임산부란 이유로 대형마트에 줄을 서거나 약국을 순회하진 못했다. 인터넷을 온통 뒤져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 주소를 모았다. 그러나 이미 모두 품절이었고 구매 가능한 마스크의 가격은 몇 배씩 뛴 후였다. 공영방송에서 마스크를 판매할 때마다 100통 가까운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들린 것도 몇 번뿐이었다. 몇몇 사이트에서 마스크가 입고되는 시간을 기다려 재빨리 클릭했지만 클릭과 동시에 모두 품절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났다.
아빠를 안부 통화를 하면서 무심코 말했다.
“아빠, 마스크 있어? 사람들 많은 곳 갈 때는 꼭 마스크 써야 해. 서울은 난리도 아니야. 마스크 못 사.”
“마스크 없어? 그럼 뭐 쓰고 다녀?”
“예전에 사놓은 거 아껴 쓰고 있지.”
“그래? 낼 한 번 약국에 가봐야겠네.”
아빠는 다음 날 차를 끌고 온 동네 약국과 마트를 다녔고 역시나 마스크 한 장도 구하지 못했다.
“아빠가 여기저기 얘기해 놨어. 아빠가 마스크 보내 줄 테니 사러 다니지 마.”
그리고 아빠는 매일 한 장, 두 장씩 마스크를 사 모았다. 공적 마스크를 판매하기 시작한 첫날은 아침 9시 번호표를 받고 오후에 마스크를 받기도 했다. 처음엔 마스크 열 개, 다음엔 마스크 열두 개를 택배로 보내왔다. 자신은 그중 단 한 장의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자신이 딸에게 해줄 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듯이 마스크를 사 모았다.
“아빠 쓸 거도 빼놔야지.”
“여긴 사람 없어서 괜찮아. 면 마스크면 돼.”
공적 마스크가 풀린 다음에도 아빠는 자신이 마스크를 보내주겠다며 사러 다니지 말라는 말만 재차 했다.
가족이란 뭘까.
난 가족이 어렵다. 가족이 애틋하지만 반대로 영화 <인어공주>의 대사처럼 “난 혼자 살 거야, 가족 같은 거 없이 그냥 나 혼자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 거야.”라고 생각했다. 가족은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짐 같은 거니까. 몰래 내려놓을 수도 없고 짊어지고 가기도 힘든 그런 것 말이다. 일본 코미디언 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을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특히나 한국은 가족을 개인보다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세대가 바뀌며 가족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직은 가족에 가치를 더 둔다. 그래서인지 가장 가깝기에 상처도 깊을 수 있는 게 가족이다.
나는 가족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오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가족을 선택해 왔다. 사랑이 부족했고 붙임성도 부족하게 자랐다. 부족한 채 관계가 서툰 어른이 되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본 적 없기에 행복한 결혼 생활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가족이 더 나를 예속시킬까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택한 나의 가족은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 무언지 알게 해주었다. 그저 함께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따라하면서.
그리고 결혼 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겼다. 어느새 난 걱정 끼치는 딸이 되어 있었다. 아빤 딸이 혼자 살 때 보다 결혼 후 더 많은 걱정이 생긴 듯하다. 하지만 왠지 난 그런 마음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무엇으로나 독립하기 위해 애쓰고 살았으므로. 난 나대로 잘 살 테니 걱정 말고 자신의 삶을 잘 살라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이 모두 나 때문에 이곳에 도착했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젠 까마득할 청춘이었던 당신의 시절이 나 때문에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족은 마지막 사랑이진 못해도 누구에게나 첫 사랑이다. 처음 세상에 나를 꺼내어 준다. 비록 나의 삶을 대신 해줄 수는 없지만 나의 삶을 지켜봐 주는 것 역시 가족뿐일지도 모른다.
부디, 우리,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