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 딸램이 2개월 만에 원서 200권 읽기까지
아이에게 영어책을 읽어주다 보니 몇 년 전 교보문고에서 샀던 그림책이 생각났다. 광화문 역으로 가는 지하에 교보문고 간이 매대가 있는데, ‘만원의 행복’이란 이름으로 페이퍼백 아무거나 3권을 만원에 파는 행사를 하길래 영어그림책에 대해 1도 모르면서 그냥 그림 이쁜 걸로 샀다. 그리고는 책장 어딘가에 박아 놓았다가 아이에게 영어그림책 읽어주면서 생각이 나서 꺼내 보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책 수준이 너무 높은 걸 샀다. 글씨도 작고 글밥도 많고.
언젠가 어느 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영어책을 읽어주는 걸 보았다. 두 돌도 채 안 된 아이에게 미국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읽는 수준의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원어민들이 저 책을 2살인 자기 아이한테도 읽어줄까?”라는 생각을 했다. 두 살 아이에게 한글로 책을 읽어줄 때도 초등학생이 읽을 만한 수준의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서 왜 영어책은 그런 걸 읽어줄까 싶었던 것이다. 그 아이 엄마가 책의 수준을 나타내주는 지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좀 달랐을까?
영어그림책을 읽어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분들 중에 위와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많은 분들이 사교육에 맡기지 않고 집에서 영어그림책을 통해 아이가 영어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하지만, 어떤 책을 읽혀야 할지, 어떤 수준의 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몰라 막막해한다. 다행히 그런 엄마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는데, 아이들을 위한 영어책 수준을 알려주는 지수가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AR과 Lexile 2가지를 많이 이야기한다. 둘 다 미국 학교에서 널리 쓰이고 있고, 우리나라에 있는 영어도서관에서도 이들을 도입해서 책을 분류한 경우들도 많다. 그래서 2가지를 알고 있으면 책의 수준이 어떤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데, 문제는 둘 다 임의로 선별한 책에 지수를 부여하다 보니 AR이나 Lexile 지수가 없는 책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 이 유명한 책들은 우선적으로 분석되어 있고, 이 지수에 따른 책 리스트들은 아이에게 읽히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작성되어 있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먼저 AR에 대해 알아보자면, AR(Accelerated Reading) 지수는 ‘르네상스 러닝’이라는 회사에서 만들었고 이 회사는 책을 분석하여 책의 내용과 관련 있는 퀴즈를 콘텐츠로 만드는 회사다. (현재까지 20만 권의 책이 분석되었다고 한다.) 레벨테스트를 하면 테스트받은 사람의 수준이 나오고 그 수준에 맞는 AR 지수의 책을 추천해주는 SR이라는 시스템을 만든 것인데, 어학원들이 주로 이 시스템으로 아이들의 레벨테스트를 한다. 이 글 후반에 이야기하겠지만, 굳이 레벨테스트하러 어학원에 가지 않아도 쉽게 자신의 단어 수준을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어쨌든 다시 AR로 돌아가면, AR은 0~14까지 있는데 문장의 평균 길이, 단어의 철자 수, 단어의 난이도, 책에 포함된 어휘 수를 기준으로 분류하여 1.5 같은 식으로 표기한다. 1.5의 의미는 ‘미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1학년 5개월 차에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수능 영어의 평균 수준은 9.5, 보통 3.0~10.5 사이에서 출제한다고 한다.)
AR 1점대의 책은 한 페이지에 1~2 문장 정도 있는 수준이고 단어도 쉽다. AR 2점대는 3~4 문장 정도가 있고 문장 구조도 좀 더 어려워진다. 1점대보다는 이야기가 풍성해져서 아이들이 재밌게 보는 그림책들은 2점대의 책들이 많다. 2점대 중 후반으로 가면 관계대명사를 이용한 복문이 나오기 시작한다. 3점대는 챕터북이 나오는 수준으로 5~6 문장 이상이고 단어도 어려워진다. 2점대와 3점대는 수준이 확 달라지는 느낌인데,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 학습 수준이 달라지는 것과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다.
Lexile(렉사일)은 미국 교육평가기관인 Metamertics에서 20여 년간 4만 4,000권의 책의 난이도를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책의 등급을 구분하여 개발한 지수다. 책의 난이도를 측정하는 지수지만 독서능력 평가지수로도 활용된다. TOEFL을 치면 성적표에 시험 점수와 함께 Lexile 지수가 표시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Lexile은 숫자 뒤에 ‘L’ 자를 붙인 형태로 표기하며 100만 권 이상의 책에 Lexile 지수가 부여되어 있다. 미국 50개 주에서 활용되고 있고 교사들에게도 가장 신뢰받는 공신력 있는 지수라서 스콜라스틱 같은 유명 출판사에서도 자사 도서에 Lexile 지수를 부여한다.
Lexile은 어휘와 문장의 길이를 함께 측정하여 0~1700L로 분류한다. 미국 도서관 사이트에서 책을 검색하면 Lexile 지수를 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200L 이하의 책들이 초보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국내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의 렉사일 지수는 295∼381L,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렉사일 지수는 880L, SAT의 렉사일 지수는 1,330L, 수능은 1170L 정도다.) 주니어 토플 사이트(https://toefljunior.lexile.com/)에서는 Lexile 수준을 입력하면 그에 맞는 도서나 신문기사를 추천해주기도 한다.
자신의 Lexile 수준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사이트가 하나 있다. http://testyourvocab.com/라는 사이트인데,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신이 아는 단어를 체크하고, 영어공부를 했던 경험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면 단어 수준을 알려준다. 그 숫자를 10으로 나눈 숫자가 자신의 Lexile 지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원어민의 단어 수준은 25,000~30,000개 수준이고, 원어민이 아닌 경우 보통 2,500~9,000 단어를 알고 있다고 한다.
AR과 Lexile을 확인하는 방법은 각각 AR과 Lexile을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AR은 http://www.arbookfind.com/, Lexile은 https://hub.lexile.com/find-a-book/search에서 책 제목을 입력하여 검색할 수 있는데 AR과 Lexile 둘 중에 하나만 있거나 둘 다 없는 책이면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예를 들어 AR 지수는 없고 Lexile 지수만 있는 책인데 AR에 들어가서 검색할 경우 당연히 AR이 검색 안되고 그러면 다시 Lexile 사이트로 들어가 검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Lexile 사이트는 모바일에 최적화도 안 되어 있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나마 Lexile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아마존에서 책을 검색하는 것이다. 아마존 사이트에서 책 제목을 입력하면 책 화면으로 이동하는데 아래로 스크롤을 하면 상품 정보에 Lexile 지수가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방법은 온라인 영어서점 웬*북 사이트에서 책을 검색해보는 것이다. 가끔씩 표기가 빠져있는 것도 있어서 웬*북에서 찾아보고 없으면 아마존에서 다시 검색해본다. 웬*북은 읽기 지수에 따라 책을 분류한 카테고리도 따로 있어서 ‘수평 읽기(비슷한 수준의 책을 읽히기)’를 위해 검색할 때도 편리하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그 서점과 관련 1도 없는 사람이다. 이용하다 보니 편리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줄 뿐.. 그 서점에서 나에게 상이라도 줬으면 좋겠…;;;)
개인적으로는 Lexile이 더 공신력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스타그램(@hannah_y_baek)에서 영어 그림책을 소개할 때나 강의할 때는 AR 지수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는데 이유는 하나다. AR이 더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AR 지수는 보는 순간 “아, 이 책 수준이 얼마구나”라는 걸 바로 파악할 수 있지만, Lexile은 표를 외우고 있지 않으면 표를 참고해서 수준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Lexile보다는 AR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공기관에서는 AR보다는 Lexile을 훨씬 많이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색하다 보니 영국도 Lexile을 많이 쓰는 것 같다. Lexile 사이트를 보면 180개국 이상이 Lexile을 사용한다고 적혀있는데, 일러스트에 태극기도 크게 있다.)
AR과 Lexile을 일일히 찾지 않고 수준이 적당한 책을 파악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일명 '다섯손가락' 규칙이라고 부는 것인데, 책 아무 쪽이나 펼쳐서 자기가 모르는 단어가 5개를 넘어가면 너무 어려운 책이니 고르지 말고, 2-3개의 모르는 단어가 있는 책이 적당한 것이니 그런 책을 고르라는 규칙이다. 너무 글밥이 없는 책은 불가능하고 소위 얼리 챕터북(Early Chapterbook)이라 불리는 챕터북 초기 정도부터 적용할 수 있다. 경험상, 그림책은 AR 2점대 후반 책부터 가능하다.
읽기 지수와 관련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아이가 영어책을 읽기 시작하면 엄마들은 내 아이의 읽기 수준을 확인하고 싶어 하고 빨리 올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레벨 테스트하러 어학원도 돌아다녀보고 2점대 책을 곧잘 읽는다 싶으면 곧장 3점대 책들을 공수하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AR지수 2점대와 3점대 책의 수준은 차원이 다르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2학년 때보다 공부를 어려워하는 이유랑 비슷하다. 얼마 전에 딸램 친구 엄마를 통해 알게 된 건데, 도서관 시스템을 도입한 학원들은 AR 지수 하나 올리는데 3개월로 잡는다. 미국 원어민 아이들이 1년간 책을 읽어서 올리는 지수를 우리나라 아이들은 일주일에 겨우 2-3시간 읽으면서 3개월 만에 올리려고 한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그렇게 성급하게 지수를 올린 애들이 챕터북에서 흥미를 잃고 영어책 읽는 것을 중단한다. 엄마표영어는 챕터북에서 망한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읽기 수준이 충분히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읽기 지수 올리기에 급급하다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읽기 지수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수평 읽기’다. 아이가 어느 정도 읽기 수준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그 수준에 맞게 비슷한 지수의 책을 많이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2점대 중반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수준의 리더스북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수평 읽기를 꾸준히 하도록 이끌어주면 자연스럽게 아이의 읽기 수준은 올라간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들을 책을 읽을 때 꼭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읽진 않는다. 현재 내 딸램은 2점대 중반의 책을 읽어주고 있지만 종종 그보다 어려운 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도 있다. 자신이 소리 내어서 읽는 책은 1점대의 책들이다. Lexile 지수에 맞게 책을 읽으라고 할 때 -100에서 +50으로 잡는 이유도 비슷한 이유다. 여유 있게 아이와 책 읽기를 즐기다 보면 언젠가 숫자도 늘어나 있음을, 숫자를 높이는 게 우선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