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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Dec 22. 2020

너에게 보내는 편지.

<키다리 아저씨>

Dear. 사랑하는 주디에게~


너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 시골에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어. 교실에서 낯을 가리던 내가 보기 안쓰러우셨는지 담임선생님께서는 하교 후에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도와달라고 하셨지.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을 못 해서 선생님을 졸졸 따라가야만 했어. 한참을 조용히 선생님을 따라 책을 정리하다가 책 한 권이 물끄러미 보았단다. 커다란 신사 모자에 긴 그림자가 인상적인 낡은 표지, 속지는 누런색이었지만 중간쯤 폈을 때 그림 낙서들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피식 웃었던 것 같아. 


"이 책 정말 재미있는 책인데~ 집에 가서 한번 읽어볼래? 여기 카드 작성하고..."

"아~ 빌려 가도 돼요?"

"그럼~ 집에서 읽고 다음 주에 가져오렴."


나는 그 책을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었지. 내가 왜 이 날을 기억하는지 아니? 그날 집에 갔는데 열쇠를 방에  두고 온 거야. 남동생을 기다렸지만 친구 집에 놀러 간 건지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었어. 부모님께서는 저녁 7시가 넘어서 오시니 꼼짝없이 나는 집 앞에서 기다려야만 했던 거야. 평소 같았으면 나는 친구 집에 갔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날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 아파트 계단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는 책을 펼쳤지. 오후의 햇살이 아파트 계단으로 쏟아지고 있어서 무척 포근했어.


첫 페이지에 우울한 수요일이라고 했지. 나 역시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우울한 날이었어. 그날이 수요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야. 네가 왜 우울한지 책을 읽으면서 알았어. 넌 고아였으니까... 너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매우 궁금해하며 쉬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던 것 같아. 솔직히 말하자면 너의 편지들에 폭 빠졌어.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친구에게 혹은 이모들에게 편지 쓰기를 참 좋아했거든. 그런데 난  친밀한 대상이었지만 너는 아니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단지 너를 후원해 주는 아저씨가 너무 고마워서 편지를 쓴다는 건 그 당시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가 힘들었거든. 어느 정도 상대방을 알아야 편지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정말 재미있게 편지를 써 내려갔지. 내가 만약 키다리 아저씨였다면 너의 편지에 폭 빠져서 당장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을 것 같아. 그날 있었던 일들과 감정을 그대로 녹여낸 너의   편지도 편지지만 그 귀여운 낙서들이란~ 너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야?


나는 그날 아파트 계단에서  책을 다 읽었어.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을 때,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니만 전혀 춥지 않았지. 오히려 가슴이 콩콩 뛰었던 것 같아. 그분이 키다리 아저씨였다니 말이야. '나에게도 언젠가 키다리 아저씨 같은 분이 나타날까? 그 사람에게 너처럼 내 모든 생각과 느낌과 이야기들을 글로 전할 수 있을까? 그건 어떤 기분일까?' 너를 책으로 만난 덕분에 나는 그 후로 몇 번을 도서관에 가서 비슷한 책을 빌려봤어. 그때 읽은 책이 바로 빨간 머리 앤, 소공녀였거든.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여전히 주디 너는 내게 영감을 주는 멋진 주인공이야. 키다리 아저씨가 네가 작가가 될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잖아. 너를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차근차근 너의 꿈을 향해 발걸음을 디뎠던 것처럼 지금 나도  그 길을 걷고 있어. '잘 쓰고 싶다'라는 욕심은 없어. 그저 내가 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머물렀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느꼈던 마음처럼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에 주디로 남는다면 더 행복해진 테니까... 날이 추워졌어. 책 속 세상에선 어떤 계절이 흐르고 있을까? 

다시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우울한 수요일은 아닐 테니 걱정 말고~ 



                                                                2020. 12. 22 화 너의 팬으로부터.        


https://brunch.co.kr/@snowysom/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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