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를 주문하시면 10시까지 토스트가 무료입니다’라는 말, 나는 그 말에 그만 현혹되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그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졌으며 또 생각 없이 카드를 내밀고 말았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아 따뜻한 걸로요’ 그리고 나는 확인을 위해 다음 문장을 카드 끝에 연속으로 끼워 넣었다.
‘토스트 먹어도 되죠?’ 나는 소심하게, 아무런 정보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토스트를 몇 장 먹어도 되는지 물었다. 두 장이 무료로 제공된다는 문구와 사장의 밝은 컨펌을 받고서야 나는 여유 있게 토스터 앞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두 장과 딸기잼, 그리고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배달되기까지, 그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또 생각 없는, 말하자면 회색만 가득한 카페 안을 새벽 공기처럼 비틀비틀하며.
오늘도 나는 새벽길을 홀로 여는 사람이었다. 월요일은 팽팽했지만 아침 길은 비교적 낮게 고요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며 나는 이 지독한 외로움의 투쟁을 언제쯤 멈출 수 있을지 생각했으나, 그런 가정은 내 의지로도 타인의 충고로도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투쟁, 해방의 역사다. 역사는 불연속적으로 궤도를 이탈하는 듯 보이지만 오늘 새벽처럼 비슷하게 또 괴이하게 반복됐다. 나는 늘 같은 길을 걸어야 했다. 이것은 운명이자, 반항이자, 평범한 어휘들만 반복하는 내 문장의 불안정함과 닮았다. 내 시각에 따라 변해가는, 무겁게 여겨지거나 가볍게 여겨지는 것들. 그러니까 새벽 공기와 차가운 도로, 따뜻한 버스 같은 모순적인 공간과 존재하다 사라져 가는 존재들의 머무름.
나는 이 세계에서 낯선 것들이기도 반가운 것들이기도 했다. 아파트 외벽 사이를 흐르는 저 회색의 물결처럼 저 먼 곳에서는 고요가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다만, 그 함성은 오로지 나에게만 환기됐으니 과연 객관적으로 실존한다고 증명될 수 있었을까. 다행인 것은 내가 그 광경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광경 한가운데에서 지루하게 헤엄치는 중이라는 것, 그 두 가지를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나는 세계의 질서 속으로 안전하게 편입된다는 사실이었다.
멀리서, 얼마나 멀리, 가늠하기 곤란한 탈색된 붉은색이 가라앉았으며, 애타게 저물어가는 듯, 시작하는 듯 분간할 수 없는 에너지가 세상을 감싸 안았으며, 나는 그 흐름과 속도를 인지하기 위해 불연속적으로 어떤 희망적인 단어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세상은 붉고 또 충만하게 노랗고 다시 파란색으로 변신해가고, 그 사이에서 외롭게 몸을 움츠려 드는 새벽달의 온기도 같이, 저 아파트 외벽이 발산하는 인공적인 색소 속으로 침잠되고 있었으니, 대체 그 세계에 규합되지 못하는 나는 어찌 이 세계의 일원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니까 거짓일지도.
나는 단지 참된 명제를 찾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탄성을 내지르는, 빛의 몰락을 목도하는, 가벼운 인간일 뿐이니, 저 낮게 흐르는 새벽달의 비명을 이 빈 가슴속에 노랗게 새길 따름. 나는 새벽에 만난 낯선 반가움을 떠올리며 아메리카노와 토스트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토스터는 속으로 감기는 소리와 함께, 철썩하며 빵 두 장을 바깥으로 배출했다. 노랗고 빨갛게 익어버린 빵 두 장, 새벽에 구경한 노랗고 빨갛던 하늘의 어느 시점, 나는 두 세계의 질서를 생각하며 교란된 생각들을 하나로 불러 모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재했다.
나는 충만해 보이는 빵 조각의 거친 질감도, 아파트 외벽에 걸쳤던 새벽달의 허기진 감각도 모두 내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결국 나는 그 둘 모두를 소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만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글로서 두 가지의 기억을 보관하고 복원하는 방법 외에는 그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못했다.
빵 두 장을 흰 종이에 포장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인간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어떠한 세계도 파괴하지 않았는데, 존재하기 이전에 파괴가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른다고 믿으니, 나는 더 나약해지는 것 같았다.
글쓰기 모임에서 함께한 문우의 블로그를 가끔씩 방문했었다. 그분을 통해 알게 된 "공대생의 심야 서재" 시 필사를 신청하면서 "일간 공심"이라는 에세이 연재도 함께 신청했다. 전에 한 번도 연재되는 글을 메일로 받아본 적 없었다. 그땐 '읽어보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겠지 '라는 맘, 그 하나뿐이었다.
정확히 작년 1월 13일부터 2월 28일까지 35개 글이 내 메일로 저녁 배달되었다.
아이가 잠들면 지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누런 폰 화면에 까만 글씨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제목. 섬세한 묘사와 담담한 감정 표현의 글 속으로 순식간에 몰입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 스쳐 지나간 풍경, 어린 날의 회상, 작가의 성격, 소설을 이어 쓴 내용, 시... 몇 편 읽지 않았는데 평일 저녁이 기다려졌다. 날 위해 전해지는 편지처럼 느껴졌기에~ 하나하나 소중히 읽고 피드백을 달았다.
어떤 글은 읽다가 옆에 아이가 자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체 빵 터져서 입을 막고 웃고, 어떤 글은 숨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시간.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작가님께서 어쩔 수 없이 책 집필로 다음을 기약했을 때 가장 서운해했으니까...
"빨리 일간 공심으로 돌아오세요."라는 말에 "ㅎㅎ"라는 문자만 반복하실 뿐~ 내 진심은 몰라주는 것 같아 적잖게 서운하면서도 언젠가는 오시겠거니 그때까지 잘 기다려보자... 그랬다. 빠르면 가을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가끔 "일간 공심"으로 언제 돌아오시냐며 내 존재를 각인시키며...
작가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간 공심" 은 두 번 멈췄다. 언젠가는 다시 오실 거라고 믿었지만 생각보다 기다림은 길었다. 역시 작가는 글을 쓸 때 반짝반짝 빛이 난다는 걸 깨달으신 걸까? 저번 달에 다시 배달되는 '일간 공심'이 반갑다. 누군가의 애독자가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 냄새나는 글을 읽고 공감하고 숨 쉬는 건 무엇보다 가슴 떨리는 일이라는 걸 독자로써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