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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ul 10. 2020

퉁퉁 불지 않는 잡채.

자기란 무엇인가?-하루키 <굴튀김을 읽고>

"오늘 자기가 만들어 준 잡채 먹고 싶어요. 콜?"

"콜"


내가 만든 요리 중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내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음식 그건 바로 "잡채"이다. 명절에 남은 음식 중 잡채는 단골 메뉴이다. 안타깝게도 조금만 지나면 퉁퉁 불어 뚝뚝 끊어져서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음식, 하지만 외할머니께서 만드신 잡채는 퉁퉁 불지도 냉동실에 오래 보관하고 바로 꺼내어 데워도 처음 만들었던 모습 그대로 쫄깃쫄깃 맛있었다. 


커다란 시장바구니를 들고 길거리에서 잡채에 들어갈 양파, 당근, 파프리카, 버섯, 시금치를 산다. 마트에서 당면과 돼지고기, 어묵과 맛살도 준비한다. 주방에서 찬물에 야채들을 담그고 뽀득뽀득 깨끗하게 씻어 먹기 좋은 사이즈로 썰어둔다. 5~6cm면 딱 좋다. 시금치는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살짝 대친다. 돼지고기는 다진 마늘, 간장, 후추, 설탕, 참기름에 밑간을 해 놓고 표고버섯도 간장, 참기름, 설탕으로 밑간을 해둔다. 


모든 재료들을 다 넣고 볶아 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색이 연한 순서대로 하나씩 프라이팬에 넣어 따로따로 볶는다. 양파(어묵, 맛살)-버섯- 파프리카-당근-버섯-고기 순서로 볶는다. 하나하나의 고유의 향과 색이 불을 만나 살아난다. 볶아진 재료를 큰 볼에 넣는다. 숨이 죽은 재료들이 수북이 쌓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파릇파릇 생기가 돌던 야채들이 그 형태와 모양이 살짝 달라진다. 아삭아삭 배어나던 야채가 뭉근한 즙이 되어 씹힌다. 야채들이 불을 만나 익어가는 시간처럼 내 삶도 세월을 만나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 10대 20대의 생기는 없어도 성숙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자리를 잡는다. 예전에는 마냥 어린 나이가 부러웠으나 이제는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내가 좋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익어가고 숙성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간을 보기 위해 재료를 젓가락으로 섞어서 입에 넣어본다. 야채와 고기, 버섯향이 미묘하게 뒤섞여 축복처럼 입안에 퍼져간다. 면과 섞이면 어떤 맛을 낼까?


이제 냄비에 물을 끓인다. 잡채에서 중요한 건 면을 삶는 것이다. 미리 불려놓지 않아도 끓는 물에 8분. 8분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채에 받쳐 바로 찬물에 헹군다. 당면에서 물이 쭉 빠지면 남은 수분 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프라이팬에 기름을 약간 두르고 면을 볶는다. 

뜨거운 물에 익혀 나온 당면을 찬물에 헹굼으로써 탱탱함이 유지된다. 마치 내가 글을 쓰는 느낌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상에 치쳐 축 쳐지더라도 글을 쓰는 이 순간은 뇌가 찬물에 담겨 나온 것 마냥 탱탱하게 긴장되기 때문이다. 잘 써야겠다는 욕심은 한 글자 한글자 쓰면서 날려버린다.  


물기가 완전히 빠진 당면은 투명한 색에서 약간 흰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뭉툭하게 떡처럼 엉켜 붙는다. 이때가 바로 양념을 넣어야 할 순간이다. 간장, 설탕 참기름을 넣고 볶아준다. 충분히 색이 나오면 기존에 볼에 넣었던 재료들을 한대 섞어준다. 이제 완성이 된 것이다. 마지막에 뿌리는 깨소금은 좀 더 눈을 즐겁게 해주는 장식과 같다.


무엇을 더하지 않아도 빼지 않아도 딱 적당한 잡채. 간장을 조금 더 넣어 잡채밥을 해 먹어도 아니면 아이의 입맛에 맞게 심심하게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 된다. 인근에 사는 친정 부모님, 외할머니, 남동생 부부에게 갔다 주어도 충분할 만큼 나는 재료를 아끼지 않는다. 모두 나누어 주고도 남는다면 지퍼팩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한다. 생각날 때 꺼내어 프라이팬에 볶아주면 처음 했던 모양 그대로 잡채 맛을 즐길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은 음식을 만드는데 가장 큰 보람이 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게도 이 일련의 과정들이 수고스럽거나 짐스럽지 않다. 물론 칼을 다루다 다쳐서 피를 보기도 하고 불에 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내 인생에서 만나는 걸림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손이 다치는걸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게 다가오는 사고나 힘든 일은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했던 것들은 아니다. 모두 때와 예기치 못한 일이었고 그 때문에 생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 서서히 아물어갔다.  


음식이 주는 기쁨, 그 기쁨 안에 나의 삶이 녹아있다. 나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도 맛있게 만들어진 잡채 안에서 빛이 난다. 이제 탱탱한 잡채를 만들어 식탁에 놓아보면 어떨까? 분명 맛있게 식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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