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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Sep 04. 2020

25년 만에 그를 보다.

밥 로스를 아시나요?

온라인 개학으로 아이와 꼭 붙어지내는 요즘. 늦은 오후는 하루 중 가장 지치는 시간이다. 되도록 미디어 노출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루에 1~2시간은 아이와 tv 앞에 앉게 된다. 이른 저녁 준비를 마치고 아이와 나란히 앉아 tv 채널을 돌리던 중이었다.


"엄마~ 와~ 저 아저씨 머리가 폭탄머리예요."

"응? 오랜만에 보네 저분"


tv에서는 커다란 팔레트를 들고 캠버스 앞에 있는 그가 보였다. 노을 지는 하늘을 커다란 붓으로 쓱쓱 칠하는 뒷모습에 나는 리모컨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아 나도 크면 저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옮겨 담고 싶다.' 초등학교 시절 내 마음속에 "화가"라는 꿈을 심어줬던 사람. 그분이었다. 그림을 그립시다. - 밥 로스. 


학창 시절 다른 프로그램은 보지 않아도 ebs에서 해주던 "그림을 그립시다."는 꼭 챙겨봤었다. 모든 그림이 아름다웠지만 그중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은 계곡 물줄기와 오래된 나무판자들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은 눈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다. 나이프로 흰색과 다크 브라운을 섞어 만든 땅 그위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작은 자갈들~


완벽하게 다 그려서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캠버스 오른편과 왼편에 커다란 나무 기둥이 등장하곤 했다. '망쳤다 망쳤어." 싶을 때 이리저리 붓터치를 하고 나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내 앞에 서있었다. 어쩜 수정도 하지 않고 저렇게 그림을 그리는 걸까? 

"어때요? 참 아주 쉽죠?"

그가 이 말을 할 때마다 '이게 정말 쉬울까?' 하며 집에 있는 싸디 싼 물감과 붓으로 따라 해 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를 동경했고 그의 그림을 사랑했다.


어른이 되어서야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1995년 어느 여름날이었고 림프암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그림을 그립시다'의 모든 에피소드가 30분을 넘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영상을 편집한 적이 한 번도 없이 한컷에 완성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381편의 그림을 그렸다. 

어릴 때 좋아했던 프로그램을 아이와 함께 보는 기분은 묘한 흥분을 자아냈다. 잠시 머릿속으로 추억을 꺼내보았을 뿐인데 tv 스크린에는 붉고 노란 노을과 잔잔한 호수 그리고 그 주위에서 자란 어여쁜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엄마 저 아저씨 진짜 그림 잘 그려요. 우와..."

"그렇지? 엄마가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아저씨인데 이렇게 또 만나네. 너무 좋다."


비록 지금은 죽어 잠들어 있지만 그가 그렸던 그림은 아직도 누군가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매일 선물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한참을 풀벌레 소리와 산새들이 지저귀는 저 숲을 아이와 산책하는 상상에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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