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아들 지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내게 써 보내온 편지가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고등학교 급우가 일본제 CD와 오락 게임 프로그램을 자랑하다가 친구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으며, 요즘에는 학교 친구들이 자신의 PC에 있는 일본제 게임을 전부 지워버린다는 내용이었다. 또, 지현이는 외국어고등학교(명덕외고)에 응시할 생각인데, 외고에 개설된 영어‧독어‧불어‧중국어‧일어‧러시아어 6개 과 중에서 일어과가 가장 인기가 없고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이 간다고 하면서 나에게 왜 일어를 공부하러 일본으로 유학을 갔느냐고 물었다. 아들에게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망설이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라고 간단히 써서 보냈다. 그건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일본이라면 일단 뭐든지 배척하고 본다. 이런 현상은 스포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축구든, 야구든, 권투든 어떤 경기든지 일본과의 시합이면 반드시 이기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게 우리 국민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좋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삼국 등 고대 시대 때는 우리가 일본에 모든 문물을 전해 줬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한반도가 초토화되고 특히 일제 35년간의 식민지를 상기할 때의 수치심, 자괴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일본이라는 말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일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등을 얼마나 선호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대학생들이 어학 공부나 음악 감상을 위해 휴대하는 소형 카세트의 브랜드를 조사해 본다면 더 자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때 일제 전기밥솥 '조지루시(象印)'가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어떤 면을 싫어하고 있을까? 딱 꼬집어서 이거라고 말할 순 없지만, 식민지에 대한 증오심이 아닐까?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왜 임진왜란으로 조선 천지가 황폐화되었고, 왜 35년간이나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말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무사 계급이었으나 우리는 문치 국가였다. 물론 삼국‧고려 시대 때 무사 중심의 정치를 한 적도 있지만, 대체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조선 시대를 돌이켜 볼 때, 세종의 '4군 6진 개척'이나 이율곡의 '십만 양병설' 등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한 적도 있었지만, 조선조 500년간 대부분의 왕은 국방 자체를 중국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오로지 중국으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것은 선(善)이고 그 외의 것은 악(惡)이라는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었고, 새로운 정보라는 것은 오직 중국 것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다 건너 섬나라에서 대륙 진출이라는 어마어마한 야심을 키우고 있던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너무 과소평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흐름이 천자국인 중국에서 개화의 물꼬가 트이는 일본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미처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섬나라 왜구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중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국방까지 모두 책임져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고 그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중국만 믿고 따랐던 그 결과는 어떠했나?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한 말로는 어떠했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참혹함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이를 오늘과 비교해 보자. 정부는 자주국방이니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아직도 미국이라는 대국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중국이라는 나라 대신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의존할 뿐이다. 국방뿐만 아니라 경제 등 총체적으로 미국 없이는 우리가 제대로 설 수 없으니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미국의 주도권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얼마간 일본에 유학을 갔다 왔거나 일본어를 좀 잘한다고 하여 자신이 속칭 ‘일본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일본인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제부터는 무작정 일본을 미워하기에 앞서서 일본을 정확히 알아야겠다. 정부 관계자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과연 일본의 정치‧경제‧사회 등에 걸쳐서 폭넓게 “일본은 이렇다”, “일본인은 이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감히 거의 없다고 말해 본다. 물론 일본에 유학해서 자기가 공부한 일부에 대해서는 정통할지 몰라도 일본의 세세한 부분까지 연구하고 분석해서 대응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본다. 정부는 정책적인 차원에서 전문적으로 일본 연구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단지 일본에 얼마간 거주하고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해서 일본을 아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 대한 종합적이고 충분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일본이 선진국이고 세계의 경제 대국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보다 뒤처졌던 일본이 왜 이처럼 됐을까를 조목조목 따져 보고 배울 것은 배워야겠다.
그러다 보면 지금의 적대 감정을 넘어서서 함께 어울려 사는 이웃으로서 참다운 동반자 관계가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맨날 일본의 뒤나 따라다니면서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본을 적대하기에 앞서서 냉철하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 보자.
누군가가 얘기했듯이, 미워하는 감정은 곧 사랑하는 감정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오해를 씻을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