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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차 Mar 07. 2020

타인에 대하여

코로나19와 ‘믿을 수 없음’

코로나19로 지하철 타기가 꺼려진다. 버스도 마찬가지다. 방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꼼꼼히 했으리라 믿기지도 않을 뿐더러) 방금 내린 사람이나 지금 동승한 사람의 바이러스에는 무방비다. 내가 유난한 것이 아니다. 속보가 쏟아지는 세상의 호들갑이 그런 걱정을 부추긴다. 전문가들은 손만 잘 씻으면 된다고 힘줘 말한다. 하지만 이처럼 혼란한 때에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마냥 믿을 수는 없다. 처음 발견된 전염병 아닌가. 어제까지의 상식이 오늘의 무지가 될 수 있다. 나는 타는 역에서 한 번, 내리는 역에서 한 번 손소독기를 이용한다. 양손 검지를 접어 마스크의 콧대 부분을 꾹꾹 눌러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대중교통은 고통 수단이다."

대중교통을 타는 것은 이동하는 공간을 불특정 다수의 타인과 공유하며 그들의 냄새와 체온과 저 남자의 무심한 백팩과 젖은 우산과 밀치는 힘과 부대낌과 끼임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며, 그 모든 일이 자신에게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지하철에는 ‘1호선 할배’ 같은 예측 바깥의 캐릭터들이 널렸고, 앉을 곳을 두고 벌어지는 눈치 다툼과 마침내 자리를 쟁취했음에도 내린 사람의 엉덩이 체온이 느껴져 올 때의 묘한 패배감 같은 게 있다. 대중교통은 경제적이며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훌륭한 교통 수단인 동시에 불쾌감을 안겨주는 위험한 고통 수단이다.


함께하는 일의 어쩔 수 없음, 즉 군집의 형성은 사회생활의 목적이자 리스크다. 예컨대 밥을 같이 먹는 시간은 요즘 얼마나 불편한가. 마스크라는 유일한 보호장구를 벗고 침 튀기는 대화를 나누며 간혹 반찬, 최악의 경우에 찌개를 공유한다. 서로를 믿지 않지만 눈치보기와 동질성의 문화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를 빼고 식탁에 앉아야 한다. 나와 다른 몇몇 직원은 각자 주문한 도시락을 들고 파티션이 있는 사무실 책상으로 돌아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곳은 확진자 수가 가장 많은 도시다.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심지어 자신마저 의심해야 한다.


나는 너무나 많은 실망 속에 성장한 듯하다. 어떤 동물을 사랑하는 프로파일러가 했다는 말처럼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 나는 서로 의지하면서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안다. 아니, 인간은 어떤 형식으로든 가상의 공동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사회를 이룰 수 없음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의 견해와 인간의 선함을 어느 정도는 믿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속지 않으면서 협력할 방법은 없다. 요즘은 환멸과 국뽕이라는 K-마취가 번갈아 이어진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순간에도 마음을 닫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의 배신감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2020.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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