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카카오

여름이 온다

by 유수풀

1. 책을 샀다. 읽고 싶었던 책이라 한참을 뒤적여 제일 깨끗한 앞표지를 골랐다. 집에 와서 읽으려 열었더니 어딘가에 눌렸는지 접힌 자국이 있었고 뒤쪽은 검댕으로 엉망이었다. 나는 읽으려던 책을 덮어두고 냉장고로 향한다.


인과관계를 따지려 드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무언가가 안 풀리는 날이면 꼭 K 생각이 난다. 이상하게 내가 최근에 산 과일, 안이 싹 곯아있더라. 뭘 집든 그래, 참외든 사과든. 왜 그럴까. K는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사고였다. 장례식에 가는 내내 나는 사과 생각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사과를 산 것도 순전한 충동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칼을 들고 사과부터 갈랐다. 사과 쩍-하는 소리를 내고 갈라져 노란 속살을 드러냈다. 벌써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은 그제야 느껴졌다.


그 후로부터 일이 순조롭지 않으면 과일을 사 갈라 보는 습관이 생겼다. B는 과일 점이 퍽 신통도 하겠다며 비웃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과일은 달았다. 아니, 내가 씹어 삼킨 것은 과육이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과일을 사지 않는 것이 묘한 불안감이 됐다. 냉장고에는 사과 두 알이 들어 있었다. 느긋하게 뻗친 손이 칼을 든다. 손아귀에 힘을 조금 준 것만으로도 과일은 힘없이 방향을 달리한다. 짧은 한숨이 터진다. 퍼렇게 곯은 사과 반쪽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흔들리고 있었다.



2. 시티팝을 싫어하던 때가 있었다. 이상한 가사와 반복되는 의미 없는 영어가 내겐 낭만이 아니어서 싫었다. 좋아하는 바에 가면 늘 처음과 끝이 비슷한 노래들이 연달아 나왔다. 어디서부터 새로운 노래가 시작하는지도 희미한 그 두루뭉술한 경계 사이에서 팔에 얼굴을 묻었다. 노래가 흐릿해질 때까지 눈을 감고 다른 노래를 덮어 불렀다.


내가 마신 진토닉과 네가 마신 카카오 피즈 향이 건조한 공기가 되어 우리 주변을 나돌 때까지 나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시티팝과 섞인 칵테일을 흔들면서 너는 낭만 카카오! 라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그런 노래만 찾아듣는다. 가볍게 흘러가는 노래를 잠깐 멈췄다가 다시 들으면 거기가 시작같다.


끝나면 거기서 바로 시작. 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멋대로 쉬었다. 영원함을 약속할 수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물고, 네 손을 잡고 춤을 추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춤을 출 네가 없어도 나는 영원함을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낭만 카카오는 어디 두고 혼자 왔냐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삶은 리모델링이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