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안위에 관련된 문제에서라면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라지만 그 유별난 불안이 아침잠을 깨우는 일은 지금껏 없었다. 12월 어느 이른 새벽, 나는 의식의 조각들 사이에서 아빠 걱정에 잠을 깨고 말았다. 찬물을 끼얹듯, 벼락을 맞듯. 세상의 모든 갑작스런 형용사를 길게 붙이더라도 모자랄 만큼 문득.
아빠는 지난 반년간 출장이 잦았고 그래서 아빠 얼굴을 마주 보고 앉은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아니, 실은 알맹이 없는 얘기를 나누며 시선은 tv를 향한 것이 전부였기에. 진료실에 처음 발 들인 낯선 환자의 얼굴처럼 아빠는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가진 것은 고만고만한 머리뿐이라 결국 아빠의 증상과 드러난 징표를 정리해 차트를 작성했다. 증상을 체크한다는 핑계로 전화를 걸어 아빠에게 못난 몇 마디를 대뜸 던져버리기도 했다.
사실 나는 안다. 이 모든 일은 아빠의 안위보단 나의 불안과 더 닿아있다는 것을. 나는 그를 덮어두는 일을, 감감히 버텨내는 일을 도저히 해낼만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놓인 여러 모양들, 원장으로, 친구로, 연인, 혹은 딸과 누나로서 가진 역할들을 생각해 본다. 20m 상공 위에 놓인 아찔한 외줄 타기. 그렇다고 삶의 여러 역할과 그 균형 잡기의 어려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러 높은 곳에 놓아둔 것도, 떨어지면 어디 하나 부러져야 하는 극단을 만든 것도, 실체 없는 불안에 이름 붙여 작은 떨림을 집채만 한 파도로 만든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불편할 뿐이다.
불안(不安). 신년의 첫 달을 그와 함께 보내며 평안하지 않음에 대해 생각해 봤다. 찾아오는 불안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를 알아차리는 일. 적당히 배웅하는 일. 그래서 스스로를 위태로운 위치에 자청하여 놓아두지 않는 일.
이는 평생의 숙제가 될 테지만 2024년에는 유독 그런 힘에 욕심이 난다. 아름다운 회복 탄력성, 외줄 타기에서 중심을 잃더라도 훌쩍 다시 오를 수 있는 힘에 대하여. 그래서 올 한 해도 다시 힘 빼기의 기술에 의존해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