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록 8일차 2019.6.17(월)
정오 정각에 시작된 먼 교회의 종소리는 아주 천천히 십분을 넘게 느릿하게 계속 울리고 있다. 어두운 포츄니 궁전의 최상층, 소파에 앉아 조용히 종소리를 듣는 중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베네치아. 꼼꼼한 미술감상에 시간이 많이 걸린 고로, 나폴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베니스로 돌아왔다. 좀더 보자 싶어 옷을 챙겨입고 호텔을 나서려다 아차 싶었다. 일주일에 하루는 휴관이었던 걸, 그걸 고려하여 다른 지역 여행을 계획했던 것을 잊었던 것이다. 월요일엔 베니스 비엔날레 전체가 휴관이다. 지영이를 로마로 떼어놓고 우격다짐으로 혼자 올라왔는데, 이게 뭐람. 나의 머리는 정상이란 말인가...
어쨌든, 베니스로 돌아왔으니, 다른 갤러리라도 가자...
월요일 오후. 리알토 다리에서 십분여를 걸어 도착한 Fortuny Palace에서는 한국 작가인 윤형근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윤형근 작품은 바넷뉴먼이나 마크 로스코를 연상케할만큼 정적이다. 그들처럼 색면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검은색의 깊은 면이 커다란 혹은 작은 캔버스의 면을 고요하게 나눈다. 그림에 ‘고요하게’라는 말이 과연 어울릴까? 그렇다. 그의 작품을 보면 바로 알수있다. 고요하고, 침잠된 작가의 정신세계가 표현되어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커다란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관람자의 흥분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그의 검은 면 캔버스들은 특히 이 곳, 포츄니 팔라조의 공간과 어마어마하게 잘 어울린다. 마치 고급스럽게 맞춘 의상과도 같다.
왜 비는 구질구질하게 오는지 몰라. 점점 서울 생각만 나게 말이외다.
이 허우적거리는 프랑스를 무엇이 그리 좋다고 기를 쓰고와서 비좁고 음산한 방에 틀어박혀 밥해먹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하며 제작에 몰두하는 것일까.
어디 그것 뿐인가? 잡념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는데서는 흐뭇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고독과 함께 있어야 하니 말이외다.
- 윤형근에게 보낸 박서보의 엽서에서 -
3층 전시장에 포츄니 궁전을 설명하는 책자를 놓여있어, 열어보니 이곳엔 Mariano Fortuny y Madrazo 라는 화가가 살았다고 한다. 어느 옛 시절에 그가 사용하였을 대형이젤도 몇개나 있다. 둘러보니, 같은 성의 다른 작가의 작품도 있는 것 보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 거대한 궁전을 가진 집안엔 몇명의 화가가 태어났었나보다. 공간이 대단히 동양적인데다, 관람객의 쉼을 위한 소파는 흡사 우리네 대청마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데, 가만히 앉아있으면 모기가 물어뜯기 일수다. 여름 베니스는 이렇구나.
윤형근전을 본 포츄니 팔라조 부근에 이란 전시장(비엔날레)를 굳이 찾아가 보았으나 문이 굳게 닫혀있다.(다같이 비엔날레 국가관도 휴무인가 보다). 바다건너편의 구겐하임 컬렉션을 볼까해서 걷는 도중 ... 광장 부근에 흥미로운 회화 포스터가 있길래 얼른 들어갔는데, 쿠바작가 카를로스 퀸타나(Carlos Quintana)의 전시장이었다. 쿠바사람도 그림을 그리는구나가 첫번째 들은 생각이었고, 회화적 압도감이 느껴지는 작가구나 싶은 것이 두번째 생각.
오래 걷다보니 역시 때맞춰 허기가 졌다. 후미진 골목에 맛있어보이는 집엘 들어왔는데, 옆 테이블 영어쓰는 아저씨들 셋이 앉아 자꾸 사우스 코리아, 김정은 어쩌고 저쩌고 킬, 뉴클리어... 뭐 그런 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엄청 남의 나라 얘기로 수다만발이다. 띵크어바웃! 뭐 이런 말만 들린다. 미국인인가?... 한명은 영국식 발음인데. 두명이 논쟁 중. 커다란 접시에 생선 나온 이후엔 이분들, 갑작스레 코박고 조용해졌다. 그나저나, 우연히 들어온 이 식당 음식은 어쩜 이리 맛날까... 빵도, 그 뻔한 파스타도 다르다! 지영이랑 꼭 다시 와야 겠다. 만고의 진리가 하나 있는데... 비싼 집은 맛있다는 점.
다시 구겐하임 컬렉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다보니 팔라조 치니Palazzo cini 라는 곳에서 아드리안 게니(Adrian Ghenie)의 작품전을 한다. 오오, 여기서 아드리안 게니가 그린 그림을 직접 보는구나 싶어 얼른 들어가 봤다. 그의 예전 작품을 정은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의 작품집을 본 일이 있다. 이층에는 중세의 그림 컬렉션이, 삼층에는 아드리안 게니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이층에선 중세시절의 금박 로지아 양식의 성모 그림들에, 그다지 크지 않은 보티첼리의 그림도 있다. 삼층에 게니의 작품이 들어와 있는데,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림쟁이들은 시간이 흐르면 역시 새롭게 변화된다. 한 작은 구역에 몇개의 작은 그림들이 있는데 웃음이 확 터져나왔다. 아, 이건! 누가봐도 트럼프다.
창피하고, 궁색하고 얼굴 시뻘게지는 에피소드 하나.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왔는데, 문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가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어, 남자 화장실이라고 생각했다. 다른쪽 문을 열어 나가려고 했더니 문이 잠겨있다.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진 나는, 내가 이 베네치아의 어둡고 오래된 궁전의 화장실에 갇히는게 아닌가 싶었고, 미친듯이 나를 꺼내달라고 문을 두드려대었다. 부끄럽게도 마치 한시간처럼 느껴졌던 오분여를(아니면 일분인지도 모른다) 두드린 끝, 한참만에 왠걸, 쥐고 흔들었던 문이 아닌, 옆의 푸른색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손잡이를 열어보지도 않았던 옆의 문이 출입문이었던 것. 어머나. 아... 아... 아임소리 아 쏘우트 댓 이즈 어 도어... 라고 외치며 후다닥 도망나왔다. 휴... 창피해라.
한블럭 정도 더 돌아가니, 구겐하임 컬렉션이 있다. 아무래도 유명한 구겐하임이라서 그런지 입장티켓을 끊는 곳엔 줄까지 서 있는 형편. 아... 들어갔더니만... 괜히 비싼돈 주고, 들어왔구나 싶었다... 구겐하임은 아시다시피, 미국쪽의 미술을 응원했던 컬렉터이니까, 전체가 당시(1920년~1950년)의 미국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 뭐랄까... 베니스까지와서, 잭슨폴록도, 한스 아르프도, 당시의 초현실주의나 추상표현주의 양식을 보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왜냐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동시대 미술에 푹 빠져있으니까. 다만, 막쉘 뒤샹의 미래파 그림 하나를 봐서 그것 하나는 눈호강을 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7)와 아주 비슷하게 '슬퍼하는 남자'라는 이름의 작품이 있는데... 한참을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뭐랄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진달까.(이 대목에서 뒤샹 만세!)
후루룩 모두 다 보아도 네시 남짓. 더이상 발이 아파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진희씨가 알려 준 커피집이 생각났다. 그래. 모처럼 온 이탈리아인데 제대로 커피맛 한번 봐야지 싶었다. 숙소로 돌아갈 수상버스의 루트 안에 있으니까 다행이랄까. 수상버스를 내려 또 골목을 돌고, 물을 건너 십여분을 걸어갔다. 구글맵에 입력하니 별넷이 붙어있는 가게이니, 맛난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안고 힘들어도 걸었다. 메뉴를 보니 커피콩 종류를 써놓았는데, 아아 이건 뭐 내맘대로 고르는 것도 힘이 든다.(커피콩 종류는 또한 전문영역이라 어지간한 애호가 아님 알길이 없을터이다.) 이래저래 난 잘 모르니 네가 골라달라고 했더니, 우유 있는거 없는거? 큰거 작은거? 물어보더니만... 카푸치노 더블을 준다. '아놔... 우유 없는거 달라고 했잖아...'라고 생각만 했다. 여기까지 와서 이탈리아 커피장인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사실 영어로 항의할 용기가... 없다는...)
암튼 다 마시고 아무래도 진한 커피 맛 좀 느끼고 싶어 에스프레소 원샷 하나 더 들이켰다. 진희씨 단골, 베니스 커피집 인증! 잠은 좀 천천히 자겠지.
점심엔 과식을 했는지 속이 더부룩 하다. 지영이는 로마로 갔었고, 오늘 저녁 기차로 메스트레로 돌아온다. 이따 마중나가야지...
사족
이탈리아 커피집 커피 엄청 싸다. 1.5유로에 근사한 에스프레소를 즐길 수 있다. 커피값은 우리나라가 제일 비싼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