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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상념의 장편물이다.

여행기록 9일차 2019.6.18(화)

by CALM


지영은 로마에서 혼자 잘 지내고 돌아왔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나만의 오만이었을런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싱가폴에서 사업체를 꾸려가고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독립적이고, 매사가 강박적이며, 조직의 일이 체질처럼 되어져버려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을 회사원처럼 사는 나보다, 지영은 그가 관계하는 사람들, 만나고 생활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끈끈하다. 말하자면 나도 사람을 좋아하는 부류임엔 틀림없지만 관계보다는 일을 중요시한다면 그녀는 그 반대이다. 종일 그녀가 만나고 있거나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타인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곤 하지만,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녀의 이야기 보따리 안에 있는 인물들의 이름이 매번 새롭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 사람이야?’를 반복했는데, 그녀는 또 매번 ‘아니아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고...’ 를 반복했다.


말하자면 나도 사람을 좋아하는 부류임엔 틀림없지만 관계보다는 일을 중요시한다면 그녀는 그 반대이다. 종일 그녀가 만나고 있거나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TMI로 고백하자면, 나의 경우 친구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눌때면 늘 이야기의 내용과 질이 매번 다르다.


일테면 E를 만나면 늘 자신의 상황이 7할, (매 시기마다 바뀌지만) 한정된 몇몇의 이야기가 3할이다. L은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9할이고, J는 이성에 관한 이야기가 7할이고, 새로 생긴 S 모임에서는 와인, 예술, 커피 얘기만 한다. E와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술과 예술적 성공에 대해서, M선생님과는 삶에서 겪는 우리 또는 타인의 우여곡절에 대해 대화를 하곤 한다. 유전자의 배열이 상상하지못하리만큼 다른 탓이리라. 우린 누구나 독특하니까. 그래서 소중하니까^^



이번에도, 오전엔 각자 원하는 것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못봤던 리투아니아관을 가보고 싶었고, 지영이는 무라노 섬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리투아니아 관은 아르세날르지역 안에 있긴 한데, 한참을 걸어야 했다. 나를 이끌던 구글맵은 가던 길의 반 정도에서 멈추었다. 문제는 리투아니아 국가관까지 아무런 길안내 표시가 없다는 점인데, 겨우 꾸역꾸역 다른 관광객의 뒤를 쫒기도 하다가, 지도를 보기도 하다가 골목을 돌고 돌아 그곳에 당도하였다.

IMG_0464.jpeg 아무리봐도 리투아니아관을 표시한 곳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구글맵엔 지도가 끊겨있다. 포기를 해야하나 할 즈음, 간간히 리투아니아관을 보고나오는 관람객을 만나 겨우 끝까지.

어딜가든 요란하게 표식이 되어있는 우리나라의 길과는 판이하다. 어찌보면 무성의하게 느껴진다. 보고싶으면 알아서 찾아오라는 것인가. 리투아니아 관이 수상을 했으니 망정이지, 누가 이 길도 찾을 수 없는 구석 끝에 있는 이름모를 국가관엘 찾아오랴 싶었다.

참고로 리투아니아가 어디에 위치한 나라인지 아는가? 발트해 근처, 한때는 폴란드를 잡아먹었을만큼 힘이 셌던 나라이고, 프로이센, 러시아, 폴란드의 주변에 있으며, 지금으로 말하자면 나라 이름조차 생소하리만큼 쪼그라든 나라이다. 내친김에 찾아보니 국토는 한반도의 7분의 2 가량의 면적에 1인당 GDP는 16,000불, 300만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 카톨릭 77%,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다.)


입구 부분에 앉은 안내원이 오늘은 퍼포먼스가 없고, 오로지 설치만 있다면서, 내일 오라고 하였다만, 나는 이미 내일이면 떠나는 걸... 여러모로 아말피를 갔었던 일이 좀 후회가 되었다. 아무튼, 리투아니아관을 들어가보니 신문에서 본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상황만이 연출되어 있다. 작품은 이 해변처럼 꾸며진 창고 같은 곳 안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뮤지컬 퍼포먼스를 하는 것인데, 그 퍼포먼스가 내가 방문한 날엔 없다는 게다. 이층 난간에 뮤지컬 대본이 놓여있었다. 힘겹게 찾아간 공은 어디로 갔는가. 게다가 Golden Lion을 수상한 리투아니아 관이니 더 아쉬운 것.

IMG_0473.jpg 허망하기 짝이없는 리투아니관의 쓸쓸함


https://youtu.be/xZPF6DFWPjk

유튜브 영상이 낫다.

SUN & SEA라는 제목으로 '환경문제'를 다루는 작품이라고 한다. (-_- 이 대본을 다 읽을 엄두는 안난다는...)


카톡을 해보니 지영이 역시 무라노 섬이 한산하고 조용하다고 했다.


서로 저녁 다섯시까지 따로 돌아다니는건 무리라고 생각했고, 어제 들렀던 맛난 레스토랑을 내가 지영을 데리고 가기로 하고, S.Angelo에서 만나자고 했다. 후에 생각해보니 리투아니아관 찾기의 복잡함에 실망감이 덧씌워져 그만, 여행의 길, 목적을 잃은 느낌이었다. 아무곳에도 가고 싶지않았다. 이 모든 일들이, 그러니까 악착같이 전시관을 찾는 일들이 헛되게 느껴졌던것이 아닐까.


한참만에 지영을 다시 만났고, 그녀에게 맛난 식당을 소개하겠다는 나의 결심엔 무심하게도, 왠걸, 그 식당이 문을 닫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 여행이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보면 그것이 여행의 묘미인지도 모르겠다. 사는게 다 그렇지 아니한가.


아쉬움에 그럼 다른 곳에 가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일단, 그 식당 바로 옆에 위치한 와인샵에 들어가 각자 집으로 사갈 와인을 골랐다. 나름대로 잘은 못하지만 주인 아저씨와 대화도 나누었는데, 연세는 좀 있어보이지만 영어도 조금은 했고, 그 가게에서는 세금까지 포함하여 6병에 110유로를 받고 한국으로 보내주기도한다. 와인가격은 별도이지만. 조금 욕심을 내어 와인을 네 병 샀다. 아무런 정보없이 그냥 사서, 조금 걱정은 된다. 훗날 맛 본 이 저렴한 와인은 그져 훌륭하기만 해 딱 네병만 사온 점이 후회가 되었다.



유럽에 가는 길이 있다면 모쪼록 가방은 큰 것을 가져가고, 당일 세일하는 와인을 잔뜩 사와서 세금신고를 하고서라도 가져오길 추천한다. 신고를 위해 영수증을 챙겨두는 것은 필수이다.) 혹시 깨질까 걱정이라고 하였더니 와인상점의 주인은 절대 안깨진다고 장담을 하였다. 병에 싸는 스폰지와 뽕뽕이비닐을 잔뜩 주었다. 예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장길에서 와인을 박스로 사왔을때, 한병이 깨져 시뻘건 와인이 줄줄 흘러 난감했던 일이 기억났다만, 그래도 믿어보자 하였는데, 옷 사이사이에 끼워둔 와인은 깨지지 않고 곱게 도착했다. 다만, 내 여행가방의 손잡이엔 세관을 통과하도록 큰 표식이 붙어 나와 세관에 들러 세금을 부과받았다.


일단 와인을 네병이나 샀으니, 더이상의 도보여행은 무리였다. 그나마 힘을 내어 헝가리 파빌리온과 이름모를 작가의 동토 풍경사진전시를 보고, 또 광장앞에 있었던 퀸타나 전시를 다시 들어갔다.

IMG_0013.jpeg


여행 도중에 혜원이로부터 카톡이 왔다. 샌디에고 주립대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미영이가 한국에 왔다고, 얼굴한번 보자는 얘기다. 여행을 마치고, 지영까지 함께 돌아가 같이 만나면 좋을텐데... 지영과 혜원, 미영, 넷이 같이 만난 지 십년은 된 것 같다. 넷 중 둘이 해외에 사는 탓이다. 그나마 지영이나 미영이 한국에 나올때마다 한번씩 얼굴을 보게되어 다행인데, 그중 제일 못만나는 건 지척에 사는 혜원이다. 이번에도 넷의 만남은 불발이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니, 이 곳 베니스 비엔날레를 할때마다 구경하러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하는 이 시기에 열리는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가 세트로 묶여 미술관계자와 많은 컬렉터들이 그곳을 향한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올해가 58회라고 하니, 100년이 되어가는 국제적 행사이다. 뭘 좀 해보려면 이 정도 시간은 묵어야 하는걸까.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한계를 지운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여행은 상념의 장편물이다.



아무래도 비엔날레를 왔으니, 작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좀더 내 자신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위축된 상태를 벗고 싶다. 기발한 작품을 볼때마다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곤 한다. 말하자면 마음이 가죽같은 끈으로 꽁꽁 묶여있는 양, 답답해지곤 한다. 신비한 체험같이 느껴진다. 우리의 한계를 지운 것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비엔날레의 작품들은 그런 기발한 생각에 더불어, 행동력이랄까, '행위 자체의 힘'도 또한 곁들여져 있어 더더욱 위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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