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팩트가 아닌 해석, 내 삶의 주도권 찾기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과정이다. 공기만이 아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외부 자극을 받는다. 남편의 무심한 한마디, 상사의 짜증, 친구의 자랑, 정치인의 헛발질까지. 온갖 정보가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온다.
핵심은 다음이다. 외부 자극은 재료일 뿐이다. 기쁨으로 만들지, 분노로 빚어낼지는 오롯이 내 마음 공장에 달렸다. 똑같은 비 소식에도 누군가는 “우울해”라며 미간을 찌푸리고, 누군가는 “부침개 부쳐 먹기 딱 좋네”라며 입맛을 다신다. 정보는 팩트지만 감정은 해석이다. 내 감정은 남이 던진 돌멩이가 아니다. 돌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대한 결과물이다.
결과물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좋은 감정이 퇴적층처럼 쌓이면 단단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된다. 반면 불만과 비난, 억울함이 쌓이면 삶은 악취 나는 쓰레기 매립지가 된다. 무서운 건 ‘유유상종’의 법칙이다. 긍정은 긍정을, 부정은 부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끌어당긴다. 내 안이 지옥이면 주변엔 도깨비들만 모여든다.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한다. “남편 때문에 속 터져”, “회사가 나를 안 알아줘”, “나라 꼴이 왜 이래.” 입만 열면 남 탓, 세상 탓이다. 왜 그럴까? 심리학자들은 뇌가 ‘인지적 구두쇠’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뇌는 에너지 소비를 극도로 싫어한다. 문제를 인정하고 개선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자신을 돌아보고, 시인하고, 수정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쟤 때문이야”라고 손가락질 한 번 하면? 상황 종료다. 쉽고 간편하다. 뇌 입장에서 남 탓은 ‘가성비 좋은 진통제’다. 골치 아픈 책임을 회피하게 해 주니까. 기억해야 한다. 진통제를 먹는다고 썩은 환부가 낫지는 않는다. 통증만 잠시 잊을 뿐 병이 치료된 건 아니다.
업무상 알게 된 지인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잔이 몇 번 돌자 익숙한 레퍼토리가 나왔다. “나는 참 인복이 없어. 주변에 왜 이렇게 쓸만한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어. 사업을 좀 키워보려 해도 도와주는 놈이 하나도 없네.”
사업이 제자리걸음인 이유를 사람 운으로 돌리고 있었다. 토를 달지 않았다. 묵묵히 소주잔만 비웠다. ‘사장님,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장님이 그들을 내쫓는 기운을 풍기시는 건 아닐까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엄청난 저항을 감당할 에너지가 아까웠다. 부정적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 긍정의 조언은 튕겨 나가는 고무공과 같다. 부정적 에너지가 꽉 들어찬 공간에 긍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인지적 구두쇠 모드를 이용했다.(현명한 나를 칭찬한다.) 확신한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다고 당장 벼락부자가 되거나 명예가 드높아지는 건 아니다. 장담컨대 부정이 뿌리내린 땅에서 돈과 명예라는 나무는 절대 자라지 않는다. 자란다 한들 열매는 쓰고 떫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내 안에 쌓인 감정의 투영이다. 외부 재료를 긍정으로 가공해 쌓을지, 비관으로 가공해 쌓을지. 결정권은 오직 나에게 있다. 공장의 주인은 나다.
남 탓하는 습관과 작별했으면 한다. 운 타령도 그만두자.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다”는 말은 인생의 운전대를 남에게 넘겨버리는 안타까운 고백이다.
누구도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대신 개선해 주지도 않는다. 오늘 느끼는 감정, 뱉는 말, 짓는 표정이 모여 내일의 나를 만든다. 수확의 기쁨은 씨를 뿌리고 땀 흘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닐까. 감정을 생산하고 저장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오늘 마음의 창고를 열자. 무엇이 쌓이고 있는지 확인하자. 향기로운 꽃내음인지 퀴퀴한 곰팡이인지.
다시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