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조카가 생긴 한국 이모.
겨울이 좋냐 여름이 좋냐는 질문에 나는 항상 여름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건 내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 항상 즐거운 기억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5월부터 여름방학을 맞아 8월 초, 중순에 학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6월이나 7월쯤이 되면 미국에 사는 작은 이모가 오빠, 언니와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우리가 외할머니, 큰 이모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주목적은 할머니를 뵈러 오신 것이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던 나는 그 덕분으로 값비싼 콩고물을 한몫 차지했다. 이모의 커다란 캐리어 속에는 그 시절 생소했던 치토스나 젤리벨트 같은 미국 과자와 각종 옷이나 속옷, 가방 같은 선물들이 가득해서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미국을 옮겨다 놓은 것만 같았다. 당시 아는 브랜드라곤 나이키밖에 없던 나는 이모가 '이거 좋은 브랜드 거야.'라고 말하며 주시는 갭, 캘빈클라인, 토리버치, 타미힐피거, 폴로를 이름도 못 읽으면서 소중히 여겼다.
미국에서 온 언니, 오빠와 우리는 매해 여름을 같이 공부하고 함께 사고 치며 지냈다. 사실 내가 줄곧 언니라고 부른 사촌 언니는 촌수로는 언니지만 나랑 같은 동갑이다. 그래서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지만 언니는 당시에도 나랑 동갑 같지 않게 공부도 월등히 잘하고 똑똑해서 곧바로 언니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공부도 노는 것도 다 잘하는 언니가 좋아서 동생도 내팽개치고 졸졸 쫓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동생에게 미안하다. 미안해, 귀여운 내 동생아.)
그렇게 몇 해를 같이 어울려 놀았을까, 철부지처럼 놀기만 하던 유년 시절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고 언니, 오빠의 소식은 엄마를 통해 가끔씩 전해 들었다. 그 사이 언니는 약사가 되었고 오빠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리고 외갓집의 우리 세대들 중 가장 먼저 언니가 결혼을 하고 작년엔 아기를 낳았다. 나에게 첫 조카가 생긴 것이다. 새 가족이 된 형부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마당에 새롭게 생긴 조카도 당연히 낯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조카의 얼굴은 정말 신기하게도 외할머니의 화장대 위 액자에 담겨 있던 사촌 언니의 어린 시절을 빼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진으로만 봤는데도 남 같지 않고 친근했다. 실제로 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애정이 생기다니 이게 바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인 것인가.
조카의 백일을 맞아 작은 이모네 가족이 한국에 잠시 머물게 되어 지난 주말에는 이모와 사촌 언니, 오빠를 다 함께 서울에서 만났다. 18년도에 있었던 언니의 결혼식 때 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오빠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면 외할머니네 집에서 지냈던 때가 선명하게 생각난다고 했다. 특히 이모부가 오락실을 데려가 주는 게 너무 좋아서 우리 집 베란다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앉아서 이모부가 골목사이로 오기를 기다리던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노라고 말했다. 오빠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에게도 즐거운 기억 중 하나인 그 시간들이 오빠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내심 기뻤다. 같이 붙어 보낸 시간은 짧아도 그 기억 하나로 오빠, 언니는 아직도 우리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처럼 깔깔대며 들어주고, 나는 작은 이모의 서울 여행을 잘 가이드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계획표 만들기에 열중하고, 언니의 첫아들은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지만 벌써 애틋한 나의 첫 조카가 되었다.
우리는 자아가 생기기 시작하는 때부터 자신이 나고 자란 환경과 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독립적인 자신을 만들고 나면 이따금씩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에게는 매우 예민하게 비친다거나 남들은 기피하는 것들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일들의 원인은 거의대부분 유년시절에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유년시절과 그 이후 형성된 자아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옛 상처는 이따금 나를 화나게 하고 나의 옛 기쁨은 의도치 않게 나를 행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독립하고 나서는 다시 가족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내 방식대로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감사하게도 나는 사랑받는 아기였다. 작은 이모와 언니오빠 덕분에 설레는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외할머니의 아랫목에서는 언제고 누워서 뒹굴거릴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가족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아껴준 덕분에 슬픔과 시련을 모두 언젠가 지나갈 잠시잠깐의 소나기처럼 여길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어린 시절의 받았던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모든 어른들은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만 한다.
모든 아기들은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만 한다.
나의 첫 조카를 더불어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행복하게 자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