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끝
온라인으로 드로잉을 주고받는 동안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새 학기를 앞두고 모두들 마지막 술주정으로 봄을 맞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미대생들은 도리어 바빠졌기 때문이다. 미대는 방학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기 시작하자마자 제출해야 하는 개인 과제로 인해 잘 찾지 않는 어두운 습작실마저 학생들로 붐볐다. 나는 낮에는 습작실 캔버스 앞에서, 밤에는 자취방 노트북 앞에 붙어있으면서 아주 가끔 언니를 생각했다. 입시도 시험도 아닌 취미 미술에서 날카로운 비평을 하기란 어려웠고 언니 역시 그런 걸 원치는 않아 보였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그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봐달라고 했던 사람. 누군가 봐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걸까?
내가 그리는 거의 대부분의 그림은 보여진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그렇게 공개된 장소에 내놓으려고 그리는 그림들이다. 그것은 때론 값어치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아 재화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금전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시기를 위해서 손목과 허리는 끊임없이 불구가 된다. 언니의 그림은 누군가 보아주길 바랬다. 보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작품이 되고 빛이 났다. 나는 언니의 그림에 대해 몇 문장을 쓰면서 그림이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는 걸 느꼈다. 그즈음이었다. 나도 누군가 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림 말고, 나를 바라봐 주어서 당신의 안에 내가 잘 박혀 있으면 좋겠다고.
약속한 드로잉 과외 기간은 무심히 끝났다. 나는 그날만은 특별한 평가 없이 서로의 드로잉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언니는 빈티지 체어에 앉아 비스듬히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내왔다. 그 사이 공부를 좀 했는지 인체 비율은 얼추 맞춰져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순정만화 스타일이었지만. 그 남자는 아마 김 교수였을 것이다. 나도 곧바로 드로잉을 보냈다.
-자화상이에요.-
그림 속 나는 눈을 가볍게 뜬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니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좋은 그림이다’ 정도로만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인사는 무척 짧고 가벼웠다. 감사했어요. 감사합니다. 갑자기 이 순간에 커피 한 잔이 생각났는데, 의례적인 인사가 맴돌고 입이 삽시간에 썼다.
이후에 언니를 남포동에서 만나게 된 건 지극히 우연이었다. 나는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고 일부러 한 시간 일찍 남포동에 갔다. 여기에 2대째 영업하는 오래된 화방이 있어 물감을 사러 종종 들리곤 했었다. 그날도 화방에는 청바지에 후드티를 눌러 쓴, 누가 봐도 미대생인 애들이 느릿하게 장바구니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수트를 빼입은 언니가 있었다. 물론 나는 힐끔 곁눈질을 주고 그를 지나쳐갔지만. 나를 보고 알은체를 한 것은, 당연히 언니였다. 혹시, 드로잉 과외 해주신 분 아니세요? 내가 눈만 끔벅거리고 있으니 그가 그림,그림, 하면서 폰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보냈던 자화상을 기억하고 있었던가. 오랫동안 들여다 봐주었던 걸까. 나는 목을 쓸어내리며 낯선 반가움을 내비쳤다. 언니는 곧장 시간있냐며 커피 한잔하겠는지 물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나서, 커피를 마시러 가면서, 남포동 밤거리를 걸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만나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언니는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나는 그 사이에 언니를 단단히 새겼다. 그리고 내 앞에 우연히 나타났던 이 사람은, 우연함만큼이나 가벼이 사라졌다. 나는 연작 과제 제목을 언니로 정해서 제출했다. 담당 교수는 졸업전시회에 서울에서 큐레이터들이 내려올 거라고 귀띔하며 내 작품들을 꼽사리로 끼워 넣겠다고 했다. 잘될 거야.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실 뒤쪽에는 류시화의 시가 걸려있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나는 교수만큼 많은 것을 묻으며 살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입이 써졌고 내가 묻어왔던 것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