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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 이제 기원이 안 만나. “
엄마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며칠간 집이 진공상태가 된 것 마냥 붕 떴다. 우리의 대화는 의미 없는 문장이 줄었고 퍽 어눌해진 기운을 풍겼다. 이 충격이 완화되면 엄마는 헤어진 이유를 물어보고 싶을 터였다. 다행히 나는 나대로 견고한 방어막을 쌓았다. 기원이 공무원 준비한대. 이제 보기 어려울 것 같아. 당시 기원은 공무원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 째였는데, 대충 봐도 공시생의 포스를 느끼긴 어려웠다. 그 애의 마인드는 전투에 임하는 장군보다는 흡사 천하 태평한 아기 강아지와 같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엄마는 더는 기원에 대해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만 그 뒤를 따라 시작된 위로와 응원은 부담스러울 만큼 넘쳐흘렀다.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고 기원을 딱 1년 더 만났다. 충동적으로 거짓 진술을 한 것치고는 어떤 직감이 있었던 건지. 마치 말하는 대로 된 것 마냥 점점 기원을 보기 어려워졌다. 이 아기 강아지는 하루에 5시간을 공부하면서 4시간씩 괴로워했다. 외롭고 힘들다며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쉼 없이 떨었다. 문득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가 기억난다. 내가 도울 건 없냐고 물었더니 이내 핸드폰 너머로 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렇게 옅은 숨을 남기고 연락이 끊겼다.
잠수 이별의 후일담은 동기들 사이에서 긴밀히 퍼졌다. 나의 이별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도 과 내에서 구전동화처럼 매해를 돌고 돌았다. 나는 졸업 후 그 애의 이런저런 소식을 집요하게 전달해주던 K와 멀어지게 되었고 덕분에 귀 닫고 사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K에 따르면, 그 애는 어느 겨울 절에 딸린 고시원에 들어갔다더니 이듬해에는 이름 모를 섬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경찰공무원을 준비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는 일반행정직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교행 공무원 시험반에서 봤다는 소식이 들렸다. 강아지는 여전히 성견이 되지 못한 듯했다.
엄마는 이런 저런 사정을 몰랐다. 그동안 알고 싶지도 않은 얘기 들어내느라 귓구멍이 아팠던 사정 따위. 잘 만났던 것처럼, 합의하에 잘 헤어졌고, 이제는 서로 안부도 묻는 사이로 지내는 줄 알았을 거다. 엄마가 기원과 나의 관계를 평온하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그간 조금씩 해왔던 거짓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탓이 컸다. 엄마가 아침 인사 마냥 기원의 안부를 묻는 통에 계속 공무원 준비를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둘러댔던 게 시작이었다.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되감기가 어려웠다. 엄마의 생각 속에 기원이라는 캐릭터는 결국 내가 심어준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잘 못 꿰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천히 맥을 짚던 기억에 잡음이 끼일 때쯤 나는 추억팔이를 그만두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깔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배달 어플을 다시 깔았다. 지긋지긋한 과거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더니 과거의 내가 현재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돈이라도 시원하게 쓰면서 현재로 돌아와야 했다. 나는 엄마가 냉장고를 채워 넣고 갔다는 사실을 잊고,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구성된 1인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곧 핸드폰에는 50분 내로 도착한다는 알람이 경쾌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