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 여정, 그리고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사회의 전체적인 담론이 아닌,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왜 굳이 외국까지 가?"
미국으로 대학원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난 한국에서 석사까지 졸업하고 직장에서도 승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고, 근 10년간 한국도 IT 강대국중 하나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지위가 많이 올라왔기에 UX 디자이너 또한 수요도 공급도 많은 시점이기도 했다. 이직을 싶은 회사 선후배, 동기들은 속칭 '네카라쿠배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새롭게 자신의 커리어를 잘 쌓아가기도 했다.
내가 미국으로 오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1. UX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 여정.
이전 회사에서 디자인을 하며 가장 좋았던 점을 뽑자면, 내가 디자인한 서비스, 제품이 전 세계롤 뻗어나간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난 '거인의 어깨 위에서 지휘를 하는 난쟁이'로 이걸 표현하곤 하는데, 비록 나는 하나의 작은 디자이너일지라도, 내가 디자인한 제품은 그동안 내가 가보지 못했던 나라에서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과 마주하고 그들의 삶이 조금 더 편리해지고 행복해지게 도와준다는 건 UX 디자이너로서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궁금증을 불어 일으켰다. 나는 한국에 있지만, 내 주 고객층은 미국사용자들이었는데, 매번 디자인을 할 때마다, 내가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최적의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사회라지만, 짧게 짧게 다닌 여행 외에 한국에서만 30년을 살아온 내가 바다 건너 그들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이 정말로 좋아할 디자인을 하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도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사용자의 경험을 디자인한다는 UX 디자이너인데, 혹시 내가 한국의 경험에 맞춰 그들의 삶을 디자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나는 나 스스로를 내 디자인의 주 사용자층이 있는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직접 그 문화에 깊숙이 들어가고, 사용자 리서치로 만나는 실험실 안 사용자가 아닌, 내 삶에서 그들을 인간으로서 만나고 싶었다. 내가 그 문화에 충분히 스며들고 그들의 사고방식, 삶의 패턴, 주변 환경을 이해할 수 있을 때 - 그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만 꼭 필요한, 공기 같은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Out of your comfort zone.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독립적이며 동질화된 사회에 속한다. 동아시아 삼국(한/중/일)이 지리적으로 유사했을지라도, 독자적인 문화, 언어, 민족을 가진 이 세 나라는 다른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이 서로 싸우며 섞이고 융합된 역사를 통해 보면, 동아시아 삼국은 얼마나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 덕분에 영어권 나라들로부터 한국어는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가장 공통점이 없고 배우기 어려운 언어에 속하기도 한다. 참조)
동질화된 사회(Homogeneous society)에는 다양한 이점이 있다. 일단 서로 비슷하기에 어느 정도 예측가능하며, 크게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겪을 일도 상대적으로 적다. 어디든 예외는 있지만, 어느 정도의 사회적 안정성과 신용이 담보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편안함과 신뢰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장점만큼이나 아쉬운 부분 또한 명확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하다는 건, 그만큼 서로가 기대하는 평균치가 있다는 것이었고, 성실함이 기본이 된 한국사회에서 그 기준치는 매우 높았다.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이 '기본'이 되는 사회였고, 그 성실함은 시험 성적에 맞춰 등수를 매기던 학창 시절을 벗어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안정되고 선망받는 직업을 가지고, 늦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서울 내 브랜드 아파트에 살며, 아이를 월 몇백만 원씩 하는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것.. 은 주변에서 수없이 들어온 기대치였고 내가 따라야 할 것 같이 미리 짜인 길이었다. 서른 개가 넘는 결혼정보회사의 촘촘한 등급 분류 기준만큼이나, 그 기준과 순위는 사회 안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동질화된 사회, 답이 정해져 있는 사회를 벗어나 - 다양성이 있는 곳, 여러 개의 답이 공존하는 사회로 가고 싶었다. 서른이 넘었지만 굳이 급히 결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며 직장의 안정성에 벌써 안주하지 않아도 되는 곳. 내가 익숙한 것, 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정해진 기준으로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곳. 한 번에 잘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두 번째, 세 번째 기회가 있는 곳.
화성으로 민간 우주선도 띄울 것 같은 2024년에, 태어나보니 한국이라 여기서 현 사회의 답을 그대로 따르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그렇게 시애틀행 편도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