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추구하는 삶은 서핑과 닮아 있다. 서핑은 파도를 외워서 타는 운동이 아니다. 방금의 물결은 다시 오지 않고, 바다는 늘 다른 얼굴로 움직인다. 그래서 서퍼는 예측보다 반응으로 버틴다. 파도의 높이를 재기보다, 몸이 먼저 중심을 수정한다. 바람이 바뀌면 각도를 바꾸고, 물결이 꺼질 듯하면 체중을 옮긴다. 변화란 그런 것이다. 정해진 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계속 달라지는 질문 앞에서 몸으로 대답하는 일에 가깝다.
상황과 맥락은 늘 내가 예상한 방식으로만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심하는 순간 균형은 무너지고, 올라타는 일보다 다시 올라서는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보드 위로 올라간다. 왜냐하면 파도 위에 서 있는 동안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생생함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피곤하지만, 그 피로 속에는 살아 있다는 감각이 섞여 있다. 안정이 주는 편안함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온기다.
안정을 추구하는 삶은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과 닮아 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는 온 신경이 균형에 쏠린다. 핸들이 조금만 기울어도 심장이 먼저 흔들리고, 넘어질까 봐 다리보다 생각이 더 먼저 굳는다. 어느 방향으로 쓰러질 듯하면, 반대로 틀어야 한다는 이론은 머리에 있지만 몸은 쉽게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넘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달라진다.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중심이 무너질 듯하면 저절로 핸들이 돌아가고, 균형은 의식이 아니라 습관의 영역이 된다. 그때부터 사람은 비로소 앞을 본다. 바퀴가 아니라 풍경을 보고, 넘어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어디로 갈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작동하는 것이 바로 관성이다. 관성은 노력의 흔적이 쌓여 만들어진 자동화된 안정이다.
3년, 5년, 10년. 시간이 쌓이면 대부분의 일은 어느새 익숙해진다. 예전엔 작은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되새기고, 작은 선택 하나에도 오래 망설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비슷한 상황을 비슷한 방식으로 넘기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타성이라고 부른다. 흔히 타성은 부정적인 말로 쓰이지만, 사실 타성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만든 가장 강력한 보호장치이기도 하다. 매 순간을 새로 계산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성은 양면적이다. 우리를 덜 흔들리게 해주는 동시에, 덜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예전엔 크게 울렸던 일들이 이제는 조용히 지나가고, 한때는 인생이 걸린 선택처럼 보이던 문제들이 어느 순간에는 일상의 소음처럼 처리된다. 안정은 그렇게 사람을 살게도 하고, 조금씩 무디게도 만든다.
변화는 나를 깨우고, 안정은 나를 흘러가게 돕는다. 파도 위에 오래 서 있고, 자전거만 오래 타면 당연히 지친다. 그래서 인생은 늘 한쪽만 선택하며 살 수는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어떤 시기에는 일부러 흔들려야 하고, 어떤 시기에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굳어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파도를 탔다고 믿지만, 돌아보면 그때도 이미 어떤 관성에 기대고 있었고, 중년이 되어 안정에 들어섰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사실 크고 작은 변화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서 있는가를 아는 일이다. 지금의 나는 파도 위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 위에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다시 어느 쪽으로 몸을 조금 더 기울이고 싶은지를 알고 싶은 이다.
변화는 늘 불안하고, 안정은 늘 조금씩 무뎌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 둘을 번갈아 통과하며 살아간다. 깨어 있기 위해 흔들리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익숙해진다. 파도 위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날도, 아무 생각 없이 자전거를 몰고 멀리까지 가던 날도, 모두 같은 삶의 연장선에 있다.
어쩌면 삶이란, 파도와 관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중심을 다시 잡아가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연습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안정 속에서도 완전히 굳지 않은 채로 계속 앞으로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