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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나무 Nov 25. 2020

"준다(Give)"는 생각의 오만함

실은 받고 있는지도 몰라

대학교 2학년 무렵, 해외 봉사에 대한 꿈이 생겼다.

당시는 해외  단기 선교의 붐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내 인생의 한 시기는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개발 도상국인 나라에 가서 전공을 살려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시 '20대 초반의 나' 오지로 떠나는 순교자처럼 비장했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이름도 생소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날 결심을 충동적으로 했다. 대학의 한국어학과 학과장님의 연락처 하나만 알고 떠난 낯선 여정이었다.


5시간 비행을 하고, 다시 차로 4시간을 달려간 끝에 국립외국어대학교(이니야즈)에 도착했다. 무슬림이 대다수인 이 지역에서는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고 잘 대접할 때 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외국인인 내가 도착하자마자 기분 좋은 러브콜이 이어졌다. 특히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나와 함께 지내고 싶어 했다.


학과장님은 한국어과 학생을 소개해 주셨고, 타지키스탄 가정인 A의 집에 하숙생으로 들어가서 1년을 살게 되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나의 오만이었음을 그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깨달았다.

 

그날 오후 학교 앞으로 A의 기사가 우리를 태우러 왔고, 도착한 집은 한국의 우리 집보다 훨씬 넓고 좋았다. 화장실이 우리 집 안방보다 넓었는데 바닥과 벽면이 모두 고급스러운 목재로 치장되어 있었다. 사우나 시설이 완비된 욕실이었다. (우즈벡은 구소련에서 독립한 나라인데, 부유한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A의 부모님은 나에게도 "우즈벡 아빠, 엄마"라면서 살갑게 대해 주셨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따끈한 수프와 빵, 과일을 정성껏 차려주시고 저녁에도 현지 음식을 해주셨다. 당시에는 집에서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던 시절이라 그 고마움을 깊이 알지 못했던 게 지금도 죄송하고 감사하다.


(생각해 보니 그 생일상을 차려주셨던 기억, 내가 A의 어린 동생이  방에 드나드는 걸 불편해하자 둘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바로 집 앞에 얻어 주신 기억도 난다.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분들이다.)


주려고 떠난 "봉사"에서 나는 줄곧 받기만 했다. 만약 가난한 가정에 머물렀더라도 그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을 것이다. 주려고 떠났는데 받기만 하다니. 애초에 "준다" 태도와 생각이 오만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섯 살 막내딸은 사랑을 많이 받는다.


오빠 둘에 막내 딸인데다 터울도 큰 편이니 우리 집에서는 가장 막강한 팬클럽을 보유한 존재이다. 


자다 깨서 얼굴이 부은 채로 나와도, 눈곱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어도 가족들은 무조건적인 팬심을 발휘하며 너도나도 아이를 끌어안는다.


그래서 며칠 전, 아이를 안고 말했다.


"우리 말랑이(애칭-살이 보드랍고 말랑말랑하다.)는 참 좋겠어. 엄마 사랑, 아빠 사랑,

할아버지 사랑, 할머니 사랑, 오빠들 사랑... 다 받아서 좋겠어."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가 한숨을 쉰다.


그리고 상상조차 못 한 이야길 한다.

아주 짧고 명쾌하게!

.

.

.

.

"엄마, 내가 사랑을 줘~~~~."

"응?(진심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 말이 맞기도 했다.

우리 모두 아이에게 사랑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이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있었다. 

딸내미는 매일 같이 "하트"를 그리고, 정성껏 색칠해서

엄마에게, 아빠에게 사랑 표현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가끔 육아가 힘들어 큰 소리를 내거나 서운하게 해도

아이는 엄마를 용서하고 "우리 엄마가 최고"라고 한다.


이 아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매일 '엄마엄마엄마' 하는 환청이 들릴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난 아이에게 주고 있다고만 생각했을까.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온라인 수업을 독려했고, 아이들 상담을 해야 했고, 각종 행사를 안내해야 했고, 환기와 소독을 쉬지 않고 해야 했고, 쓰레기봉투까지 잘 묶어야 했다.


담임을 맡고 보니 모든 일이 내일일세.

온갖 일을 해도 해도 할 일들이 유여할사. 

(현대어 : 일이 넘치는구나) 


담임은 이제 지겹다고, 제발 그만하고 싶다고 투정을 부릴 무렵, 칠판 한쪽을 채워놓은 삼행시들이 내 맘을 울렸다.

이 시대 가장 흔한 이름으로 얼마나 특별한 시를 지었는지!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여신 소리를 듣겠는가. (보자마자 부끄러웠다.)


지혜를 나누어 주고, 영원한 양분을 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실은 아이들에게 준 것보다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생각을 다시 하며 감사하게 된다.


나도 누군가의 기억에서는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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